대한한국 최초의 경험디자이너

손홍민을 꿈꾸다

by 경험디자이너


“어떤 일을 하세요?”

“사람들의 경험을 디자인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나를 소개하는 문장이다.

나는 어떻게 국내 유일의 경험 디자이너가 되게 된 것일까?

지금부터 평범하지만 평탄하지 않은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미역 냄새가 흠뻑 묻어나는 부산의 작은 동네에서 세상과 마주했다.

태어난 직후 바로 서울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어린 시절의 부산에 대한 기억은 없다.

서울에서의 생활 중 제일 먼저 기억나는 것은 유치원 시절이다.

유치원을 다니는 것이 재미없거나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유치원을 다니는 것이

싫었다. 궁여지책으로 삼은 것이 태권도장이었다. 지금은 태권도장에 미술학원, 영어학원을 비롯해 여러 학원을 동시에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시에는 유치원과 태권도장 중 한 곳만 다니면 다른 곳은 다니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치원을 중퇴하고 등록한 태권도장은 가히 신세계였다.

발차기, 낙법, 격파 등 유치원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것들을 배웠다.

덕분에 난생처음 배움의 욕구와 성장에 대한 갈망을 느꼈다. 이러한 갈망은 곧 재미로 이어졌고 대회에 나가 수상까지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태어나 무언가에 푹 빠져서 최선을 다해본 첫 경험이었다.

나름 평탄했던 유년시절은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끝이 났다.

살던 집에는 매일같이 빚쟁이가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우리 가족은 아무도 없는 척 숨죽여 있어야만 했다.

어떤 날은 우리가 집에 있는 걸 알아차렸는지 빚쟁이가 집 앞에서 오래 있는 탓에 밖에 나갈 수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법원에서 나와 집안의 물건들에 빨간딱지를 붙였다. 책상을 제외한 모든 물건과 제품에 딱지를 붙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을 정리하고 본가인 부산으로 다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몸과 마음으로 사랑했던 태권도와는 작별을 고하게 된다. 9년이 흐른 뒤 다시 찾아온 부산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구수한 사투리를 비롯해 산 위에 지어진 집들까지 모든 것이 새로운 광경이었다. 다행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학 온 초등학교는 프로 축구 선수들을 많이 배출한 학교였다. 학교 수업이 마치면 친구들과 항상 축구를 하고 집으로 복귀했는데 우연히 그곳에서 축구부 코치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된다. 처음에는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축구부에 가입하여 연습을 했는데 어느 날 코치가 부르더니 부모님 동의서를 받아 오라고 했다. 이유인즉, 유니폼과 같은 회비 납부가 필요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집에 이야기를 했고 그날 저녁 집안이 뒤집어졌다. 참고로 부모님이 수영 선수 출신이다. 힘들고 어렵게 운동을 한 경험이 있기에 자식에게는 운동을 시키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던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김연아를 비롯해 박태환, 박지성, 손홍민 등 스타 스포츠 선수가 여럿 있지만 당시는 공부만이 살길이라는 문상주의가 뿌리 박혀 있던 시기였다.

제2의 손홍민이 되었을 수도 있었던 소년의 꿈은 그렇게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