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원하라 Jul 17. 2020

여름의 꽃, 장미와 능소화

빨간 장미가 지나간 후에 찾아오는 주홍빛 능소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5월의 장미, 6월의 능소화, 1월의 동백이다. 그중에서도 순위를 정하자면 가장 좋아하는 꽃은 동백, 그다음은 능소화, 마지막이 장미꽃이다. 장미와 능소화는 5-7월까지 볼 수 있는 꽃이고, 동백은 12-2월까지 피어난다. 두 꽃은 뜨거운 여름에, 다른 한 꽃은 시릴 정도로 추운 겨울에 얼음 곁에서 피어난다.


모든 것을 바짝 말려버릴 것만 같은 뜨거움이 시작되는 5월에는 동네 사방팔방에 장미꽃이 핀다. 이때 만나게 되는 장미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로맨틱한 한 송이가 아니다. 우르르 어디에 싸우러 가는 듯한 기세로 뭉쳐서 펼쳐있는 이를테면 ‘장미 떼’에 가깝다. 근데 그 무수한 장미가 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완벽한 백그라운드를 이뤄주는 초록색 잎사귀들 위로 화려하게 피어있는 장미꽃을 보고 있노라면 이 여름, 뜨겁고도 활기차게 멋진 여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힘마저 솟구친다.


여름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장미꽃은 시들어버리고 만다. 나는 장미가 시드는 모습이 그렇게 초라해 보이고 안타까울 수가 없다. 분명히 잘 맺혀있고, 붙어있는데도 불구하고 산채로 죽은 듯한 모습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꽃이 매달린 채로 꽃잎이 꺼무스름하게 어두워지며 말려들어간다. 화려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초라하게 오므라드는 장미꽃에는 웬 파리와 벌레들이 윙윙 날아다닌다. 초라한 말년이다. 보고 있기만 해도 안타깝고 아쉽다. 한창 예쁠 때 사진이나 많이 찍어둘 걸.


하지만 장미를 언제 좋아하기라도 했냐는 듯, 나의 눈과 마음을 앗아가는 능소화가 어느새 활짝 펴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6월에 이렇게 활짝 펴있는 걸 보면 내가 장미에 취해 있을 때도 너는 부지런히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겠구나. 기특하고 고맙다. 텅 빈 마음을 갑자기 주황빛으로 싱그럽고 상큼하게 채워주는 능소화가 반갑기만 하다.


능소화는 덩굴을 타고 꽃이 피는데 바람이 불어오면 줄기가 살랑살랑 위아래로 움직이고, 그 움직임에 꽃까지 살포시 춤을 춘다. 가만히 있을 땐 그림같이 예쁘고, 바람 타고 움직일 땐 무용수처럼 아름답다. 나는 6월의 능소화를 보면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가만히 고개를 들고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기도 하고, 요리조리 핸드폰을 돌려가며 최상의 한 컷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능소화 아름다움의 묘미는 저 미묘하고도 아름다운 그라데이션의 조화가 아닐까. 마치 베이스 립스틱을 바르고, 그 위에 포인트가 될 수 있는 짙은 컬러를 덧바르듯 붉기도 하고 노랗기도 한 은은한 색이 잘 어우러져서 자꾸만 눈이 간다.


능소화가 좋은 이유 중 하나는, 꽃이 툭 하고 떨어지면서 지기 때문이다. 요즘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주인공 고문영은 이런 말을 했다.


에이씨, 난 이렇게 잔잔바리로 떨어지는 꽃들이 제일 싫어. 나는 목련이 좋더라, 질 때 모가지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게 화끈해서 예뻐. 비유가 너무 꽃 같지?

아니요 언니. 너무 좋은데요. 나도 능소화가 한 방에 확 져버려서 좋았다. 한창 능소화가 피어나다가 질 때쯤이면 능소화나무 아래로 만개한 꽃송이가 툭툭 떨어져 있다. 마치 실수로 잠깐 내려온 것처럼, 잠시 바닥에서 쉬려고 온 것처럼. 가장 예쁜 모습 그대로 툭 떨어져서 아쉬움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좋다.


가장 절정의 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싶은 것은 나의 오랜 욕망이자 바람이었다. 가장 예쁠 때, 가장 능력치가 좋아서 좋은 실적을 낼 때, 가장 사랑할 때, 가장 부유할 때, 가장 건강할 때 내리막의 순간을 겪지 않고 그대로 사라지고 싶다는 비겁한 욕망. 피었다가 지는 자연의 순리는 외면한 채로 가장 예쁜 순간만 담고 싶어 하는 나의 비겁하고 약한 욕심.




내가 사랑하던 여름의 꽃들을 다시 생각하다 보니, 나는 왜 꽃이 지는 모습은 단 한 번도 찍어두지 않았을까 후회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활짝 피어있는 상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데 나는 왜 그 순간만을 기억하려고 했을까. 싹이 움트는 모습도, 꽃을 피우기 위해 잔뜩 웅크린 모습도, 서서히 몸을 굽혀 힘을 잃는 과정도, 완벽하게 저버려서 생기를 잃은 모습도 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



어떤 꽃 좋아해요?


(쭉쭉 길어지고 있는 줄기와, 가느다란 줄기마다 사이좋게 넓이를 맞춰 싹을 피워가고 있는 몽우리와, 어느 순간 확 피어져서 하늘 위에서 살랑살랑 춤추는, 그러다가 휙 떨어져서 바닥에 잠시 쉬는, 때로는 너무 커서 지나가는 사람들에 발에 짓이겨 물기가 나오는 그 모든 모습의) 능소화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