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작정하고 어두운이야기를 시작 해보려 해요.
작가란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를 해야하며 특히 동시대의 문제를 폭로하고 경고해야 한다. - 도리스 레싱-
동시대의 문제를 폭로하고 경고할 만큼의 배짱은 없는데요. 그냥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램은 있습니다.
아주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불싸히 여기지 않고, 또 어느 누구도 괴롭힘을 갖지 못한 사람.
출구를 찾지 못한 그 아이의 고통은 자기 안에 그대로 남아 그를 독살시켰다. (시몬베유. 중력과 은총)
이 책은 미성년자 그러니 청소년 근로자, 대게 '특성화고'라고 하는 고등학교에서 실습으로 나간 일터에서 목숨을 잃게 된 아이들의 부모와 선생님을 인터뷰한 책입니다. 첫 장 부터 심장이 쿵 하고 내려 앉는데요. 제가 은유작가님 특유의 담담하고 적날한 문체를 좋아하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사실이 아닌 허구였으면 좋겠다, 덕지덕지 포장 한 이야기 였으면 좋겠다라고 느끼면서 한장 한장 넘겼습니다.
일이란 특권 계층에게 이익을 안겨주려고 현재 생산체계에 억지로 밀려 들어가는 활동이다. (윌리엄 모리스)
실습을 갔다 선배들의 폭언과 폭력으로 자살은 한 동준군의 주변인들의 인터뷰가 실려있어요. 사실 이 책을 놓은지 꽤 됐는데 생생합니다. 마치 제가 동준군의 어머니를 인터뷰한 것처럼요. 당당히 슬퍼할 수 있도록 주변의 배려가 필요했던 그녀는 출근 중 아들과의 마지막 전화통화에서 여느 때와 같이 씩씩했던 아들의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슬픔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슬픔의 일부이다.(론 마라스코, 슬픔의 위안)
- 느닷없는 눈물로 대화의 일부로 예사롭게 받아 주기를 바랄 뿐이다. 기쁨을 말하듯이 슬픔도 심상하게 말하게 해달라는......눈물도 일종의 말이라는 그의 요청은 이 슬픔의 시대에 공동체가 익혀야 할 삶의 기술이 아닐까. 기쁨을 나누는 일은 배우지 않아도 사는데 무리가 없지만 슬픔을 나누는 일은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그것이 사람의 일이란 것을 나는 배웠다.-
'죄를 지어야만 잘못이 아니라 선함을 행하지 않음이 잘못이다.'
동준이 어머니를 일으켜 세운 말입니다. 아들의 아픔 눈치채지 못한 죄, 스스로를 죄인 취급하며 창문 밖 햇빛 한 줄기 마저 그들은 편하게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미 벌어진 죄를 사할 길은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과 만나 함께 울거나, 더이상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세상에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 했습니다.
작은 사람에게 마음이 갑니다. 저는 그 사람을 작으면서도 큰 사람이라고 부르는 데, 그 이유는 고통은 사람을 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스스로 제 책들에 작은 역사를 털어놓으면, 그 사람의 작은 역사는 큰 역사가 됩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직은 이해가 되지 않기에 입을 열어야 합니다. 소리 내어 말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역사적으로 청소년 노동이 사라진 적은 한 번도 없다.' 특히 일을 해도 먹고살기 어려운 노동빈공층이 갈수록 많아지고 독립적 삶에 대한 청소년들의 욕구가 커지고 있는 최근에는 일하는 청소년이 늘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청소년이 받는 부당한 대우는 사소한 문제로 치부되거나 잘 모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청소년은 노동의 주체로 존중받기 어렵다.' (배경내, 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
일자리는 소득을 얻는 수단일 뿐 아니라 어깨를 펴고 사회 구성원으로 진입하는 길이기도 하다. 어떤 일이든 노동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쌓는다. 노동이 원래 나쁘거나 해로운 것이 아니고 세상을 넓혀가는 기쁜 과정일 수 있다. 노동조건이 나쁘다면 청소년이나 성인 모두에게 유해할 텐데 사람들은 노동조건을 문제 삼지 않고 청소년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제 삼는다.
다수의 10대 노동자들은 일은 좀 힘들어도 스스로 돈을 버니까, 부모의 간섭을 벗어나서 좋았다고, 어른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 그들은 어린나이에 돈벌이를 나서야 하는 측은한 학생이 아니라 경제적 독립을 이룬 한 존재로서 여느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나쁜 사람에게 실망도 하고 좋은 사람에게 배움도 얻으면서 제 방식과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문제의 본질은 청소년 노동을 악용하는 어른들이고 존엄한 노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 시스템이지 청소년 노동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저도 애 키우는 부모입니다.' 그건 맞지. 그런데 자기 애가 죽은 게 아니잖아요. 돈 없고 힘없는 사람을 위한 정책은 안 나와요. 왜? 정책을 만드는 사람은 다 힘있는 사람이에요. 나올 수가 없어요.' (민호아버님)
이 책에서는 자살한 동준군 외에 생수회사에 일하다 기계에 끼여 사망한 민호군의 일도 다루고 있습니다. 고참들도 꺼려하는 일을 민호군은 쉬다가도 일터로 나가 기계를 만졌다고 합니다. '그녀석 나이는 어린데 똘똘해...' 그 한마디 말을 들으려고.
책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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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을 제외하고 23년 동안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현장실습생 사고가 그치지 않는 데는 민호 군 아버지의 말대로 세상을 바꿀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힘을 너무 많이 가졌다는 현실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많은 통계가 보여주듯 빈곤은 대물림되는 사회적 지위가 되었다. 상당수가 빈곤과 학력 때문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불안정 노동자로 노동을 시작한다. 또 그런 환경이 대물림 된다. 문제는 이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존엄한 노동을 할 가능성을 열악할 경제적 배경 탓에 빼앗겼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스펙을 갖추지 못했으면 열악한 환경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긴다. 사회적 책임은 정산되지 않고 개인의 책임만 정산된다. 출발의 부정의함은 생각조자 않고, 부당한 노동관계를 노력 부족에 대한 처벌로 여긴다. 처벌로 간주되기에 열악한 환경은 개선 없이 방치된다. 노동조건 자체가 모욕이자 총체적 괴롭힘이 된다.
허나 전체 사회로 보면 모든 노동자에게 해당된다. 존엄한 노동의 보장을 사회문제나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 자신을 책임지지 못한 개인에 대한 처벌로 여기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현장실습생이 아니더라도 이직을 하거나 새로운 부서에 발령받거나 안 하던 업무를 맡은 경우 낯선 환경에 던져져 현장실습생이 된다. '적응'이라는 이행기를 거쳐야 한다. 이처럼 사회 구성원으로서 모두가 '잠재적 실패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수용한다면 현장실습생의 죽음이 더 이상 신문에서나 보던 얘기가 아니게 된다.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살면서 그다지 실감하기 어려운 명제지만, 자기 아픔을 용기 내어 이야기하면 타인의 아픔이 들리기 시작하고 모든 존재의 고통이 연결돼 있음을 실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 아픔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 씩씩하다. 자기 불행을 마주하는 내면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존재와 마주하는 것 자체가 내게 힘이 됐다. 누군가 나를 믿고 자신의 아픔을 내어주는 일은 나를 숙연하고 의젓하게 만들었다. 다 잃은(것 같은) 절망에서만 삶이 내어주는 진실이 있기에 타인의 아픔을 듣는 일은 삶의 중핵에 다가가는 귀한 체험이기도 하다.
삶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삶을 저버릴 수 있을 뿐이지요. 어떤 유형의 삶이든 우리에게 뭔가를 가져다줍니다.(위화)
작지만 큰 사람들의 목소리가 우리 삶을 숙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기를, 이미 노동자이거나 언젠가 노동자가 될 아이들에게 존엄을 지키는 노동의 가치관을 심어주기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조금씩 지워주기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도 괜찮다는 가능성의 메시지가 되었으면.......(은유)
책의 말을 옮겨와봤습니다. 묵직한 무언가가 느껴지시나요? 비단 '노동'현장에 몰린 '어린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서 나이를 불문하고 잠재적 실패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무시와 조롱을 당하면서도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 감내해야 할 것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얼마 전 본 연상호 감독의 영화 두 편입니다. 학교교실과 마을에서 가진자 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착취하는 일은 벌어집니다. 만화지만 실화로 느껴서 보는내내 아팠습니다. 저 교실에 내 아이가 있다면, 저 마을에 우리의 부모님이 살고 계신다면...어떨까?
10년 전 영화, 공지영 작가님의 소설이 원작이었죠? 저는 책과 영화를 다 봤었는데요.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그들은 무참히 이용당하죠. 그들은 도움을 받을 존재가 아니라 노리개로 이용당하는 존재였습니다.
예전에는 무거운 소재의 영화나 소설은 굳이 보지 않으려 했어요. 나 까지 동화될 필요가 있나, 어차피 그사람들이 해결할 몫이지,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라고 생각했었죠. 2014년 세월호 사건을 지켜보고 나서는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도와 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게 없을 때. 되돌릴 수 없을 때. 영화 같은 일이 현실일 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 국가적인 문제일 때.
크고 작은 일이 우리 주변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같이 울어줄 수는 없어도 같이 느껴보기라도 해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어두운 영화를 찾아보고 책을 읽고 글로 옮겨보는 일. 위대한 '작가'가 아니지만 '나'라도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1919년 오늘에는 수 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나가 만세를 불렀습니다. 친구와 놀고 싶고 꿈을 키워야 했던 학생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청춘을 받치고 목숨을 받쳤습니다. 감옥으로 간 아이들은 고문을 당하거나 그 중 몸이 성한 아이들은 강제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발목에 쇠사슬을 찬 채로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도끼로 돌을 깨다 발등을 내려찍기도 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다니던 유치원과 학교가 부서지는 걸 목격하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중 전쟁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의 죽음도 있겠죠.
오늘 만큼은 가볍게 본 영화 속 한 장면이 그 시대의 현실이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늘의 안위가 시대를 먼저 산 이들의 희생과 죽음이 바탕이었다는 걸 한번은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