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사랑 나라사랑 내리사랑
때는 2003년
나는 '수시입학 전형' 2세대. 오로지 내신 100%로 입학 시켜 준 고마운 대학으로 가는 길이다.
버스 종점에 내려 다시 또 다른 버스를 타야 한다. 왕복 3시간이 걸리는 거리지만 괜찮다. 한 쪽손에는 책과 파일을 들고 당당하게 올라타는 나는 대학생이니까.
초록 잔디 밭 위 통기타 치는 훈남 선배는 없었지만 대학 생활은 매일이 이벤트였다.
수업 째고 술 마시러 가기. 과방에서 수다 떨기, 컴퓨터 실에서 번개로 리포트 쓰기. 발표준비 한 답시고 연애 상담 해주기. 맛있기로 소문난 학식 먹으러 가기. 지나가는 선배에게 밥 얻어먹기......
대학생활 중 가장 잘 한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바로 '동아리'활동이다. 동아리 이름은 GOOD WILL(좋은 의지)이였다. 강의실에 앉아 있는데 포스가 남다른 선배들이 찾아왔다.
'20년 전통을 자랑하는 자원봉사 동아리, 굿윌입니다.' 동아리 홍보를 시작했다.
우리 동아리는 매주 2회 이상 우리는 자폐아동이 다니는 특수학교로 봉사활동을 간다. 현장에서 직접 아이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학교 선생님들과의 유대관계도 좋다. 4년 동안 아이들을 만나고 나면 그대들이 꿈꾸는 특수교사가 될 것이다.' 등
다른 동아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봉사활동 횟수를 자랑하며 엄청 빡실 거니 각오한 자들만 들어와 주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며 퇴장했다.
'각오한 자...'
갑자기 각오가 하고 싶어졌다. 사실 홍보를 나온 선배가 조금 멋있어 보이기도 했지만 그 보다 비장한 그들의 모습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수능을 발로 치고 땡자땡자 놀다 입학한 나에게는 '강한 소속감'이 필요했나 보다. 다른 아이들이 열심히 수능 준비를 할 때 나는 약을 먹고 쉬어야 한다는 핑계로 조퇴를 했다. 엎드려 자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싫었다. 무늬만 수험생, 4개월 간 나태해진 나를 다잡고 싶어 동아리에 지원했다.
'어라, 테스트를 본다고?'
사탕발린 말로 유혹할 때는 언제고 테스트에 통과를 해야 받아준단다. 이제껏 통과하지 못한 자, 중도 포기한 자가 수두룩 하다는 압박도 한다.
'뭐야, 대체 이 집단의 정체가!'
© devintavery, 출처 Unsplash
나는 더 궁금해 졌다. 드이어 그 날이 왔다. 동아리에 지원한 아이들이 모였다. 선배는 오늘의 일정을 브리핑 해준다.
'1단계 미션은 체력 테스트야, 여기서 부터 OO까지 오래달리기를 할 거야, 완주해야 통과겠지?'
'2단계 미션은 장기 자랑, 춤이나 노래 둘 중 하나는 해야 돼.'
'마지막미션은 술 마시기, 선배들이 주는 술은 다 받아마실 각오를 하도록!'
왜 그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동아리를 신성시하며 어필한 지 나는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어렵게 뽑힌 만큼 지독하게 충성하며 다음 타깃을 노렸던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나는 다음 타깃이 되어보기로 했다. 목에 피맛이 올라 올만큼 달리기를 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원에서 막춤과 노래를 불렀다. 마지막 코스에서는 코 막고 소주와 맥주를 들이켰다. 오바이터도 당연히 해봤다. 비우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이치를 이 때 배웠다. 함께 지원한 친구들 중 몇 명은 '크리스찬'이었다. 마지막 미션에서 갑자기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도저히 하나님을 배신하면서 까지 이 무리에 끼여있기는 그랬나 보다.
마지막 미션까지 클리어 한 사람은 나를 포함한 4인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동아리 동기가 되었다. '굿윌 23기 OOO 입니다.' 여기 저기 불려 다니며 신고식을 했다. 졸업한 선배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단체 장기자랑을 해야 했다. 나는 유일한 남자 동기에게 수모와 수경, 쫄쫄이 타이즈를 입혔다.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 쫄쫄이를 입은 그 아이와 여자 셋은 '날아라 슈퍼보드'를 재현했다. 진짜 칫솔에 치약을 묻혀서 '치키치키차카차카초'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선배들은 배를 잡고 나뒹굴었고 열화와 같은 성의에 힘입어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치약을 묻히는 오버액션을 해버렸다.
'그래, 잠시 미쳤었다.'
선배들이 부르면 나가서 술을 마셨다. 학교 선생님이 술을 사준다고 하면 또 나가서 술을 마셨다. 축제와 엠티 때도 술을 마셨다. 술독에 빠져 그렇게 1년을 보냈다.
후배들을 뽑을 군번이 되었다. 23기 동기들과 모여 전략적으로 섭외에 들어갔다. 술을 잘 마실 것 같은 애. 노래를 잘 할 것 같은 애. 집이 가까운 애... 사전정보를 취합해 주도면밀하게 꼬셨다. 그 중의 몇은 넘어왔고 몇은 지조있게 거절했다. 내가 당했던 코스대로 그들에게 똑같이 체험시켜줬다. 그렇게 나는 선배가 되었다.
어느덧 4학년. 나는 임용고시를 준비해야 했다. 이제 학교로 자봉을 나가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일주일에 한 번, 2주일에 한 번, 그러다 나가지 않았다. 그 사이 학교는 특수교육 실무원을 반마다 배치했고 우리의 역할도 줄었다. 책임감도 줄었다. 우리가 아니더라도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눈빛을 맞출 이가 있었다. 후배들도 눈치챘다.
'더이상 우리의 자리가 없다고.'
연필 들 힘만 있으면 합격했던 전례와 달리 임용고시 경쟁률은 해를 거듭할 수록 치열해졌다. 나 또한 경쟁에서 이기려 달라든 한 낱 수험생으로 전락했고 후배들의 안위를 물어볼 여유가 없었다. 나의 20대 초반을 불태웠던 동아리는 그렇게 몇 년을 못 버티다 해체되었다.
졸업을 하고 선배들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나야 추억을 꺼내 떠들 수 있었다. 졸업 후 그들의 대부분은 학교의 '학습도움반' 선생님이었고 나는 그냥 '직장인'이었다. 물 위 동동 뜬 기름 마냥 나는 그들의 대화에 끼일 수 없었다. 그렇게 멀어져갔고 나는 아들 둘을 낳고 행주를 던지는 '아줌마'가 되었다.
어느새 1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살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작가'가 되어버렸고 내 얼굴이 박힌 책이 서점에 깔렸다. 잊고 살던 존재들이 나를 깨웠다.
저자사인회라는 모임이 바로 오늘이다. 세월의 흔적앞에서 의기소침해 지지 않게 비비크림을 두껍게 발라야 겠다. 왠지 모두다 그대로일 것 같긴하다. 나의 뜨거웠던 청춘을 함께한 이들이 무척 보고싶다.
PS.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쫄쫄이 동기, 오늘 보면 진심으로 사과할게. 그 때는 미안했다. 내 욕심히 과했다.
AFTER.
예상대로 모두가 그대로 였다. 다만 대화의 주제가 달랐을 뿐. 기미와 검버섯을 걱정하는 이에게 피부과를 추천해 주고,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 내집 마련의 애환과 퇴직에 대한 비전을 나눴다. 그들과 함께 떠들고 웃었던 덕에 나의 평균 수명은 0.5년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