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상처야 말로 꽃인 것을
자본주의 너란 녀석
by
아는이모
Mar 30. 2022
아래로
상처가 꽃이다.
- 유안진-
어린 매화가 꽃 피느라 한창이고
사백 년 고목은 꽃 지느라 한창인데
구경꾼들 고목에 더 몰려 섰다
등치도 가지도 꺾이고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진물은 얼마다 오래 고여 흐르다가 말라 붙었는지
주먹만 틈 굵다란 혹이며 패인 구멀들이 험상 궃다
거무죽죽한 혹도 구멍도
모양 굵기 깊이 빛깔이 다 다르다
새 진물이 번지는가 개미들 바삐 오르내려도
의연하고 의젓하다
사군자 중 으뜸답다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 구경이다
상처 깊은 이들에게는 훈장으로 보이는가
상처 도지는 이들에게는 부적으로 보이는 가
백 년 못 된 사람이
매화 사백 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 맡아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 말로 더 꽃인 것을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실린 시.
누군가는 말한다.
시는 행복 없이 사는 훈련이며
삶을 위로 하지도 치유해 주지도 않지만
나를 연민하고 생을 회의하게 하는 것이라고.
뚝뚝 끊어 놓은 말 사이 오고 가는 생각에 빠진다는 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일까.
6.480시간이
지남 나도 마흔.
얼마 전 책장을 정리하다 쓸린 손 등의 상처가
시를 읽고 나서 보니 유독 커 보인다.
새 살이 더디게 올라오는 걸 보니
나의 노화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사백 년을 산 매화나무만큼 오래된 것만 상처가 있지 않다.
삶에 가느다란 뿌리 하나 내리고 사는 우리의 모습도
실은 상흔이 범벅이다.
나의 손등도, 발꿈치도
갓 태어난 아기의 숨구멍도
판교 신혼부부가 되지 못한 수많은 청춘들도
제 각기 상처는 있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안내한 영상에서 박탈감을 논한다.
판교 신혼부부란 키워드를 앞세워 금수저를 찬양한다.
자본주의 때 국물이 청춘들의 상처에 맺힌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상처가 꽃이다.
오묘하게 닮은 두 문장.
시를 떠난 현실에선
상처는 꽃이 될 수 없고, 아픔은 청춘일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꽃과 상처를 넘나들며 이 봄을 당당히 누리는 일.
자본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존재가 되어 보기.
오늘도 그 발악은 계속이다.
봄이고 꽃은 피고 있으니.
keyword
청춘
상처
봄꽃
4
댓글
1
댓글
1
댓글 더보기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아는이모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출간작가
굿바이, 튼튼
저자
여전히 때 묻지 않은 꿈을 꾸는 아줌마. 재테크 책을 쓰고 경제 강사가 되었지만 동화와 소설을 쓰는 할머니로 늙어가길 바라는 중.
팔로워
115
제안하기
팔로우
작가의 이전글
나는 엄마가 안 죽었으면 좋겠어.
은퇴자금은 얼마나 필요한 걸까?
작가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