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가을, 상견례를 끝냈을 무렵 엄마는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비슷한 말을 했다.
'좀 빼먹으려고 했는데 시집간다고 하네. 일찍 해치우고 잊어버리지 뭐.'
엄마는 친구에게 아쉬움 섞인 자랑을 하느라 내가 옆에 있는지 없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졸업 후 쫓기듯 돈을 벌다, 알아서 결혼까지 해치웠다.그렇게 사는 게 그땐 당연한 줄 알았다. 그 누구도 인생을 즐겨보라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도전해 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결혼도 (대학원) 공부도 내가 돈을 벌어야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다.
'돈 벌어야 돼서요, 공부는 계속 못할 것 같아요.'
돈 앞에서 꿈을 접고, 아무렇게나 직장을 구했다. 졸업 후 백수가 되는 건 나에게 죄를 짓는 일이었다. 번 돈의 80%를 저축하며 착한 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첫 월급으로 쉽게 들어가 보지 못한 백화점 매장에서 엄마의 가방과 아빠의 벨트를 사고, 매월 부모님의 보험금을 대신 내기도 했다.
그렇게 2년간 모은 돈으로 예식장, 드레스, 신혼여행 경비 등 잡다한 결혼비용을 마련했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무언가 마음이 걸렸다. 더는 빼먹을 수 없는 딸이 된 것이 미안했던 난, 결혼식을 세 달 앞두고 부모님을 모시고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무엇이 그토록 조급했을까?
왜 굳이 스스로 몰아세웠을까?
돈에 묶여 가성비를 따지며 살아야 하는 환경에서 크다 보면 삶의 폭이 좁아진다. 덩달아 조급해진다. 남들처럼 살기 위해 시간과 비용 대비 경제적인 선택을 하도록 강요받으며
적은 돈이라도 빨리 버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 믿는다.
투자 대비 효율을 따지며, 사람이 도구가 되는 자본주의 시대. '성과'와 '돈'이 따르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런 사람들을 은밀하게 증오하지만, 나 또한 그들이 세운 기준에 못 미칠까 봐 전전긍긍해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독촉하기 시작하면 순수하게 무엇을 좋아하기 힘들다.
이런 압박 속에 자신을 가두고 자란 사람들은 (돈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무언가 원할 때 과한 죄책감을 느낀다. 취향을 숨기고 자신이 일궈낸 소소한 성공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람 사는 거 결국 다 똑같다며 세상과 나를 분리하기 시작한다. 현재를 견디기 바쁘기에 미래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미래로 나아갈 생각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가성비만 따지며 같은 자리에 머물게 된다.
같은 자리에 머무는 자 VS 미래를 보고 달려가고 있는 자
문제는 이러한 '격차'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거다. 흔히 경제적 자유라 하는,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돈을 벌지 않아도 될 때 취향을 쫓을 여유가 생긴다. 그제야 세상의 변화에 민감해지며, 나의 미래가 머물 자리를 찾는다. (하지만 그땐 몸이 안 따라준다고 한다. 실감 중이다.)
돈과 상관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일인가.
돈부터 벌어두고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일 때,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시도할 수 있는 추진력이 생긴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도록 즐기려면 자신을 후하게 대접해 줘야 한다. 좋아하는 일을 알아낸 것과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너무 잘하려고 들지 말고 인정받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버지는 꽃병을 사 오셨어요."
파리 명품 백화점 내에서 몇 년째 남성복 매출 1위를 달성하고 있는 디자이너 우영미의 얘기다. 자신의 아버지는 등록금을 내줄 형편은 못돼도 꽃병을 사 오고, 로브를 입고, 커피를 내렸다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돈'과 상관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일을 했다. 시답지 않은 낭만을 쫓은 게 아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취향을 밝혔을 뿐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가 미래에 살며 자신의 취향을 찾으며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
돈 때문에 벌어지는 격차는 어쩌면, 돈과 상관없이 꾸준히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좁혀지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