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하고 고결한 나를 위해
3년 전 우연히 시작한 블로그, 그땐 몰랐다. 내가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일 될 줄은. 살림이라는, 반복되고 지루한 일을 통해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주부, 난 '주부'란 말이 너무나 싫었던 사람이다. 물론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군 소리 없이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치도록 하기 싫을 때가 이따금씩 찾아왔고 '아 몰라'하고 미뤄도 될 일을 굳이 악을 쓰고 분노하며 청소기를 밀고 행주를 빨아댔다.
지나고 보니 알았다. 인정받지 못한 느낌, 난 이런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있었다. 두 아들을 키우며 생활비 100만 원을 타 쓰는, 게다가 운전도 할 줄 모르는, 남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한심했던 거다.행주를 집어던지고 세탁실 베란다에서 괴성을 질렀던 날, 블로그에 글을 썼다. 사소한 한풀이를 무심히 넘기지 않고 하트를 누르며, 힘내라는 댓글을 다는 사람을 그곳에서 만났다.
'글로 받을 수 있는 위로는 이런 거구나.'
나눌수록 행복하다는, 긴가민가 한 말을 조금씩 받아들였다. 내 글을 읽어 주는 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브런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티스토리 등의 매체가 늘어난 만큼 쓰고자 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누구나 작가를 꿈꾸고,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 그런 시대란 걸 알기에 난 '쓰기'에 더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짧은 글, 자극적인 문구, 기발한 영상, 핵심만 추린 정보가 넘치고, 누군가는 그것들을 흡수하며 도태되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의 이야기와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에 대해 전적으로 감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잘 듣는 사람, 기꺼이 주인공이 아닌 배경이 되는 사람, 내 글에 진심인 애독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있을지도, 또는 생겨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써야 한다. 그리고는 다짐한다. 듣지 않으면 모르는 이야기에, 노력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세계에 빠져들겠다고. 내 글을 봐주는 사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듯이 나 또한 타인의 글에 부지런히 감응하겠다고.
낡지 않는 영혼, 좀 더 나은 어른이 되고 싶기에 쓰려 드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글에 감탄할 때마다 순수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감탄의 순간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책에서는 만나지 못했다. 평범하지만 낯선 사람의 이야기가 아프도록 한 곳을 찌를 때. 보잘것없는 소수의 이야기가 새로운 시점과 사상을 불러올 때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었다.
'팔린다, 덜 팔린다'의 기준으로 책의 가치가 매겨져서는 안 되는 이유다. 팔리지 않는 다고 책이 아닐까? 책이기 전에 글, 글이기 전에 누군가의 손 끝에 베인 삶이었을 테다.
인문학 연구자 황산은 '모든 사람에게 자기만의 손가락 지문(finger print)이 있듯이 자기만의 삶의 지문(soul print)이 있다.'라고 말했다.
나만의 목소리로 내뱉지 않으면 차마 놓아줄 수 없는 이야기, 누구에게나 새겨져 있는 삶의 지문이 글이 되어 세상 곳곳에 흘렀으면 한다. '삶은 위대한 역사다.'란 말의 힘을 믿으니까. 여전히 세탁실 베란다에서 고함을 지르는 나지만, 쓸 때만큼은 정숙하고 고결한 나로 변한다. 현실과 글 속의 나는 늘 동떨어져 있지만 염치없이 바라는 게 있다. 내가 쓴 한 줄의 글이 누군가에게 가닿아 그간의 인정과 위로가 되기를, 쓰는 일에 주저하는 않는 나로 영원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