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책이 주는 인사이트
코로나가 지속되고 있어 우리 집도 이래저래 살아갈 돌파구를 찾고 있다. 그중 하나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오는 것이다. 책을 신청하면 소독해서 준비해주는 워킹 쓰루, 관내 다른 도서관에 비치된 도서를 가까운 도서관으로 배달해주는 책단비(상호대차) 서비스는 우울하고 답답한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아빠와 아이에게 너무나 고맙고 감동적인 서비스가 아닐 수 없다.
봤던 책을 무한정 돌려보는 것은 우리 집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새로운 책이 집에 유입되면 새로운 호기심이 발동하고 아이들과 새로운 소재로 대화도 가능해진다. 새로운 공기를 마시는 집에서 하는 산책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책을 빌릴 땐 추천도서라고 선별되어 있는 동화책을 빌리기도 하지만 제목이 맘에 들어 빌리는 책도 있다. 최근에 빌려 읽었던 동화책 중에 '아기 돼지 세 자매', '완벽한 아이 팔아요', 종이 봉지 공주'가 인상에 남는다. 종이 봉지 공주는 큰 아이 방학 때 2학년 추천 도서에 올라와 있던 책이라서 빌리게 되었다.
오늘은 가장 최근에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던 '종이 봉지 공주'가 주는 인사이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종이 봉지 공주' 제목을 보고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다. 궁금증을 가지고 무작정 읽어 갔다. 왕자와 공주 그리고 용은 서양 전래동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삼각관계 인물 구조다 보니 크게 인상 깊은 시작은 아니었다. 결혼을 앞둔 엘리자베스 공주와 로널드 왕자에게 갑자기(정말 갑자기) 용이 나타났다. 용은 왕궁과 엘리자베스 공주의 옷을 다 태우고 (공주가 아닌) 왕자를 잡아가 버린다.
공주는 길가에 떨어진 종이 봉지로 몸을 가린 채 왕자를 구하러 간다. 이 부분에서 뭔가 다르구나 싶긴 했다. 용과 마주친 공주는 겁내지 않고 꾀를 내어 용을 제압한 후 왕자를 구한다. 이 동화책의 핵심 메시지는 마지막 두 페이지에 담겼다.
자신을 구하러 온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로널드 왕자는 이런 대화를 친다.
"엘리자베스, 너 꼴이 엉망이구나! 아이고 탄 내야. 머리는 온통 헝클어지고, 더럽고 찢어진 종이 봉지나 걸치고 있고, 진짜 공주처럼 챙겨 입고 다시 와!"
아이들도 "뭐야~ 고마워하지도 않고 왕자가 뭐 이래~" 이런다.
이 왕자의 반응에 엘리자베스 공주는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남기고 왕자를 떠난다.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진정 자유인인이 되어서 말이다. 아마 자신의 내면의 가치를 알아주는 남자를 찾아 나서는 건 아닐까?
"그래 로널드, 넌 옷도 멋지고 머리도 단정해. 진짜 왕자 같아.
하지만 넌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야!"
나는 마지막 엘리자베스의 이 한 마디가 얼마나 강력하게 다가왔던지 며칠 동안 머릿속에 여운을 남겼다. 아이들과도 겉모습보다 내 마음과 상대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이 동화책을 앞에 두고 나눌 수 있었다. 또한 엘리자베스 공주와 로널드 왕자라는 책 속 인물에 대한 평가도 해보았다. 아이들도 다 느끼고 있었다. 로널드 왕자가 덜 된 인간이라는 걸 말이다.
'종이 봉지 공주'는 왕자가 공주를 구하는 전통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을 완전히 뒤집었다. 뿐만 아니라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구시대적인 발상에 대해 크게 한 방 날리고 있다. 나도 남자지만 로널드 왕자와 같은 남자는 정말 꼴불견이다.
하지만 나도 밀레니얼 세대에 비하면 구시대적 문화에서 듣고 자랐기 때문에 완전히 양성평등이라는 잣대에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 모른다. 이런 동화를 읽고 곱씹으면서 로널드 왕자와 같은 구시대적 생각들을 걸러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동화책을 읽고 이런 통찰을 얻을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키우는 아빠다. 아들이든 딸이든 성별보다 더 중요한 기질과 성격이 어떠함을 보고 대화하고 관계를 맺어가야한다. 더불어 외모보다 내면을 더 중요하게 가꾸는 아이들로 자라도록 돕는 아빠이고 싶다.
"그래 로널드, 넌 옷도 멋지고 머리도 단정해. 진짜 왕자 같아.
하지만 넌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야!"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박수를 보내며 글을 마쳐야겠다. 짝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