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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업공방 디렉터 Dec 31. 2020

사소해 보이지만 사실 우리 인생을 떠받치고 있는 것들

주부의 역할과 집안일 재조명해보기

나는 10개월 차를 보내고 있는 육아휴직자다. 아내는 10개월 전 만 7년 전업주부 생활을 털고 직장으로 갔고 나는 만 11년 직장생활을 잠시 멈추고 집으로 들어왔다. 우리 부부는 역할을 정반대로 바꾸어 한 해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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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밝혔듯이 올해 역할을 서로 바꿔 본 것만으로도 우리 부부는 서로를 이해하는 폭과 깊이가 달라졌다. 서로를 더 짠하게 생각할 줄 알게 되었고 서로의 수고에 더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각자가 견디어야 했던 쓰라림은 있었지만 인생 수업료로 생각하면 결코 아깝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던 즈음 어느 날 오전에 손빨래를 하게 되었다. 휴직 중에도 손빨래만큼은 아내가 주말에 해주어서 거의 해보지 않았던 집안일이다. 아이들 아침을 챙겨주고 방마다 청소기를 돌리고 큰 아이는 원격수업을, 둘째와 셋째는 거실에서 잘 놀고 있는 걸 확인하고 빨래를 시작했다. 


옷가지들을 따뜻한 물에 불려놓고 하나씩 꺼내 비누칠을 했다. 아이들 옷, 속옷, 양말이 개수로 새니 생각보다 많았다. 쭈그리고 앉아서 한참 문지르다 보니 허리가 불편하다고 신호를 보내왔다. 팔도 좀 아파오기 시작했다. '풀업, 푸시업을 할 때 사용하는 근력이 빨래할 때는 별 소용도 없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출근하는 아내에게 주말에 푹 쉬라며 호기롭게 "내가 빨래 문질러서 세탁기 한 번 돌릴게" 했던 말이 그제야 후회가 되었다. 그렇다고 하던 빨래를 놔두고 나올 수도 없는 일. 


그런데 이때 7년 동안 내가 앉아 있는 이 앉은뱅이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가족들의 옷을 비벼댔을 아내 모습이 그려졌다. 유독 팔힘이 약하고, 손도 거칠어 잘 밤에 바셀린 연고를 바르고 비닐장갑을 끼고 자던 아내 모습도 스쳤다. 가슴 어딘가 찡하게 아팠다. 막내가 어렸을  때 하루 종일 아이 셋 하고만 있는 일이 얼마나 무료하고 힘든지 아느냐고 늦게 퇴근하고 주말마다 밖으로 나가는 나에게 울먹이며 푸념을 늘여 놓았던 장면도 함께 소환되었다. 이런 잔상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며 한 가지 깨달음을 주었다. 


나의 순탄한 직장생활 11년을 떠받혀준 것은 아내의 손빨래였구나!


다른 집안일에 비하면 손빨래는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아직 불편한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이 날의 깨달음은 넉넉한 마음으로 빨래를 마무리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주무른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동작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시계를 보았는데 놀랍게도 점심시간이 다 되어 있는 게 아닌가! 마음에 허무감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리곤 생각했다. '아, 주부의 일상이 이런 패턴으로 흘러가는 것이구나!' 예전엔 지나쳤던 아내의 말들이 가슴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하루 종일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해도 가족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당연시 생각한다.
밥하고 설거지하고 집 치우면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 간다.
집안일하는 전업주무 역할만 남고 나는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 


아내는 연예 때부터 긍정의 아이콘이자 소소한 즐거움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 덕분에 아이 셋을 홀로 키워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만 7년간 이어진 전업 주부 생활은 긍정이 긍정되지 못하게 하고 소소한 즐거움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시간이다. 


1년이라는 정해진 휴직 기간에 하는 육아와 살림은 끝을 알 수 없이 이어지는 전업 주부의 삶과 차원이 다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내가 이 날 빨래 한 번 하고 느꼈던 허무감을 매일 느끼며 7년간 재정신으로 버텨낸 건 정말이지 인간 승리이자 위대한 일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아내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싹텄다. 마음에 평화를 찾아왔다. 그리곤 아침을 먹고 쌓아 둔 그릇들을 씻고 차분히 점심을 차릴 수 있었다. 


21년 3월 원래 내 자리로 돌아가더라도 이 날 싹튼 아내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계속 무럭무럭 자라도록 가꾸어가고 싶다. 아내의 집안일과 육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작업적인 존재로 작업 균형을 이루어 살도록 적극 도울 것을 다짐해본다. 

 



나는 작업치료사다. 뇌졸중과 척수손상으로 신체의 변화(장애)를 갖게 된 분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 때문에 세수하고 씻는 일, 옷을 갈아입는 일, 화장실에 다녀오는 일과 같이 작지만 결코 간과되고 넘어갈 수 없는 일상 과제들이 지닌 가치를 누구보다 많이 생각해왔다. 


그럼에도 나는 소소한 일상생활 과제의 가치를 병원에서 만나는 나의 클라이언트에게만 적용했던 것 같다. 그들의 ADL(일상생활 활동)이 그들의 삶 전반을 떠받치고 있듯이 아내의 IADL(집안일)은 아이들의 작업(ADL, Play)과 남편의 작업(ADL과 Work)을 든든히 떠받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했다. 


설거지 빨래 청소


손꼽히는 집안일 핵심 리스트다. 설거지를 하지 않고 다음날 식사를 준비할 수 없다. 더러워진 옷을 입고 외출할 수도 없다. 먼지와 병균으로 쌓인 집에서 인간답게 살기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나는 설거지, 빨래, 청소를  재정의하고자 한다. "우리 인생을 떠받치고 있는 위대한 일상 과제들"이라고 말이다. 


집안일은 가족이 함께 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한 사람에게 몰빵 되면 지치고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작업치료사로서 좀 다르게 표현해보고 싶다. 우리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가족이 함께 해야 한다고. 그래야 작업적 존재인 주부도 자신의 작업 균형을 맞추어 건강한 인격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오늘도 이런 생각을 품고 빨래를 개고 설거지를 하고 밥을 차린다.


직장 복귀를 두 달 남겨두고 있다. 1년 육아휴직 경험은 소소한 일상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닫게 하는 큰 배움터가 되었다. 복귀하면 10년간 해온 대로 최선을 다해 클라이언트의 일상으로의 복귀를 도울 것이다. 최소한 주부 역할을 주로 해왔던 클라이언트에게는 자신이 평생 해왔던 집안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었는지를 말해줄 것이다. 앞으로 집안일을 거들어야 할 역할 변화와 마주한 클라이언트에게는 돕는 집안일이 본인과 가족에게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행동 인지를 말해줄 것이다. 내가 이날 느낀 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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