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멜랑콜리아 행성이 다가온다.
내 마음에 멜랑콜리아 행성이 다가오고 있다.
-영화 ‘멜랑콜리아’를 통해 본 우울
“나 간신히 버티고 있어. 잿빛의 엉킨 실타래가 내 다리를 휘감고 있어.
너무 무거워서 걸음을 뗄 수 없어.”
당신에게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해주고 싶다. 이 영화는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두 명의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마음속 두 여자의 비중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영화를 받아들이는 각자의 느낌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본인의 상황에 대조하며 영화를 감상하길 바란다. 영화의 제목은 ‘멜랑콜리아’이다.
멜랑콜리아는 우울의 바닥을 보여주는 영화로 유명하다. 감독 라스 폰 트리에는 실제 불안장애와 우울증에 시달렸고 한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이 영화를 제작했다. 그 정신과 의사는 “우울증 환자는 일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충격적인 상황에 둔감하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본인들의 스트레스와 삶에 대한 낮은 기대치로 인해 상당히 쇼킹한 상황에도 오히려 침착함을 유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감독은 이처럼 종말을 맞이하는 우울증 환자와 우울증이 없는 사람의 상반된 태도에 주목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주인공 저스틴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는 잘 나가는 광고 회사 직원이면서 동시에 멋진 남편과의 결혼식 피로연을 앞둔 신부다. 결혼식 피로연은 다양한 이유로 삐거덕거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시종일관 행복한 표정을 하고 앉아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피로연 도중 몰래 샤워를 한다던가, 골프장 한복판에서 소변을 보는 등 어느 순간부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결혼식 피로연에 대한 스트레스와 개인적인 우울증이 합쳐진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트레스와 우울은 점점 더 그녀의 발목을 잡았고, 결국 남편 마이클은 떠난다.
2부는 저스틴의 언니 클레어에게 초점을 맞춘다. 저스틴은 파혼 후에 우울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심각한 불안 상태에 빠졌고, 언니 클레어는 그런 동생을 돌보며 함께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이 지구로 다가오면서 클레어는 패닉 상태에 빠진다. 저스틴의 우울과 난해한 행동에도 누구보다 침착했던 그녀였지만 다가오는 지구의 종말 앞에 절망의 길을 걷는다.
종말이라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공포에 휩싸여, 그녀의 일상은 점점 망가지고 피폐해져 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울로 인해 마음의 붕괴를 겪던 저스틴은 다가오는 종말에 누구보다 침착한 태도를 보인다. 그녀가 심각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끝까지 발버둥 치는 언니를 다독이며 어린 조카를 챙기고 의연한 태도로 종말을 맞이하며 영화는 끝난다.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우울한 행성’. 그 행성은 너무나 독특해서 이동 경로도 예측할 수 없었고 종말이라는 재난까지 야기했다. 함축적이지만 영화는 다가오는 우울감에 대한 공포와 우울에 대응하는 다양한 방식을 주인공에게 투영시켜 표현한다.
영화는 특별한 설명 없이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마치 벌거벗은 몸이 그려진 명작을 처음 볼 때 느끼는 감정처럼, 보는 이를 불편하게 그리고 오묘하게 만든다. 그리고 묵묵히 우울의 중심부로 달려간다. 이 불편한 공감의 영화가 끝난 후, 한 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사실 저스틴과 클레어는 같은 객체로부터 파생된 것은 아닐까? 우리 모두 마음속에 종말을 기다리는 우울한 저스틴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클레어가 공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스틴과 클레어는 서로 다른 이유로, 크거나 작거나 혹은 아예 없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저스틴이 크다면 우울이 마음을 많이 지배한 상태이고, 클레어가 크다면 우울에 둔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울증을 겪고 있는 저스틴의 말과 행동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직면할 수 있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1부, 2부를 통해 우울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관념, 표상, 억압 등 사회적으로 규정한 무언가에 의해 생기는 ‘사회적 우울’과, 피할 수 없는 요소에 의해 느끼는 삶의 불안을 포함한 ‘개인적 우울’이다. 예를 들어, 전쟁을 우려하는 여론에 의해 조성된 불안은 사회적 우울이다. 그리고, 전쟁이 이미 발생하였을 때,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환경에 대응하며 겪는 불안을 개인적 우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두 가지의 분류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발생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차이가 있다.
끝은 어디에 – 1부 (사회적 우울에 대하여)
급변하는 시대와 문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치열하게 살았다. 참는 것이 미
덕이라는 사회적 틀에 사로잡혀 앞만 보며 달려온, 그 대장정의 끝에 도달하니 남은 것은 지쳐 쓰러져 있는 ‘나’ 자신이었다.
어렸을 땐 빨리 성인이 되면 대단한 무언가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사람들은 나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미래에 있을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대학 가면 마음껏 할 수 있단다”, “성인이 되면 해결될 거야” 그러나 막상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지는 무언가보다 점점 해야만 하는 일들이 늘어나고 고민은 배가 되었다. 달콤한 거짓말에 속았다. 직장을 가지면 끝일까? 결혼하면? 아이가 생기면? 끝은 보일 기미가 없다. 우린 그럴듯한 거짓말로 포장한 싸구려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삐거덕거리는 결혼식 피로연에 참석한 저스틴처럼, 거짓 웃음으로 장단을 맞췄다.
“엄마, 너무 두려워요. 제대로 걷지도 못하겠어요. 전 무서워요.”
“다들 그래, 그냥 참아”
미래에 대한 불안 – 2부 (개인적 우울에 대하여)
클레어는 지구의 종말이라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심적인 종말을 겪는다. 돌이켜보면 나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새는 어디를 가도 4차 산업혁명에 대해 떠들어 댄다. 인공지능, 블록체인. 유전자 조작 가능으로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새로운 미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4차 산업혁명을 비롯해 사회적 주체로서의 나를 기다리는 수많은 의무를 통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회의 발전으로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4차 산업혁명이 찾아올 것이고, 누군가는 이때를 손꼽아 기다린다. 이런 피할 수 없는 4차 산업혁명에 나는 개인적인 우울을 느낀다. ‘내가 설 자리가 있을까?’ ‘취업을 해야 하는데.’ ‘이걸 배우면 쓸모가 있겠지’ 미래를 위해 희생하기로 했다. 사실 그냥 흘러가듯이 발맞춰서 살게 될 것이다. 대단한 무언가와 나의 비전이 아니라, 남들과 같이. 남은 오늘에 대해서도 알 수 없는데, 내일을 걱정하는 모순이 웃기지만 그냥 입을 닫았다. 두려움과 불안에 덜덜 떨고 있는 것이 마치 종말을 기다리는 클레어 같았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어쩌면 우린 이미 심적으로 종말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생명체는 지구에만 있어. 그리고 머지않아 모두 사라질 거야.”
혐오의 시대
내적, 외적인 우울에 대한 부작용은 다양했다. 사람들은 끝없는 관문과 성취적 한계에 부딪힐수록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았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다양한 혐오가 필요했다. 정답만 찾는 사회에서 나는 오답이 되기 싫었고, 나와 다른 것이 틀린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살게 된다. 그러나 그런 혐오의 대가로 또 다른 불안을 겪는다. 성별, 나이. 인종, 성격, 외모, 지위 등 세상에는 나와 다른 것투성이인데 나라고 혐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을 리가. 내가 혐오의 대상이 될 것 같은 조바심이 생기자 인간관계가 점점 어려워지고, 자존감은 바닥으로 추락한다.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은 자연스럽게 우울과 붙어 있다. 다양한 불안과 뗄 수 없는 우울 그 사이에서 나를 가장 혐오하는 건 내가 된 것이 아닐까.
“바보 같겠지만 난 그 행성이 두려워.”
무기력과의 전쟁
팀플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 막차 안에서 주위를 한 번 돌아보았다. 교복을 입은 수험생, 야근이 끝난 듯한 직장인, 취해있는 아저씨, 나와 같은 대학생들까지. 모두 퀭한 눈으로 무심한 표정을 지은 채 삶에 찌들어 지쳐있는 모습을 보인다. 다들 마음속으로 공통된 생각을 하리라. “아, 쉬고 싶다”
강의실이 시끌벅적했다. 내일이 다가오는 황금연휴라서 무려 5일 이상을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동기들은 물론이고, 졸업을 앞둔 선배들도 상기된 목소리였다. 나 역시도 알 수 없는 설렘이 가슴에서 끓어올랐다. 동기에게 연휴를 어떻게 보낼 거냐고 묻자 친구가 대답했다. “일단 쉬어야지!”
참 웃기다. 우리는 학기당 몇백만 원의 돈을 내고 수업을 들으러 대학에 왔건만, 질 좋은 수업에 대한 설렘보다는 황금연휴에 대한 설렘만으로 하루를 버틴다. 집에 돌아가면서도, 일할 때에도, 수업을 듣는 와중에도 우리는 그저 ‘쉬는 것’만 바라보며 달렸다. 우리가 무기력 때문에 아무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무기력이란 건 방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온종일 잠만 자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겉으로는 상당히 바빠 보이는 우리도 심각한 무기력에 시달리고 있다.
무기력하니 성과를 내기가 너무 힘들고, 성과를 못 내니 더 무기력하고. 우리가 우울의 늪에 자꾸만 스며들어 가는 과정이다.
“설명할 가치도 없어요. 나는 당신과 회사를 미치도록 증오해.”
I’m NOT fine. And you?
알게 모르게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지독하게 ‘괜찮음’을 암기했다. 처음 영어를 배우던 순간, 내가 ABCD를 깨우치고 가장 먼저 배운 문장은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였다. 다른 말은 알지 못하니까 어떤 상황이든, 기분이든 상관없이 항상 내 기분은 “좋아요”였던 것이다.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본 예능에서 한 출연자의 회화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나눈 대화는 위와 같이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였다. 난 궁금했다. 저 사람은 ‘fine’이라는 말 말고 다른 대답을 해본 적이 있을까. 없을 것만 같았다.
대학 입학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에 참가했을 때,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 물었다. “요새 어떻게 지내?” “그냥, 똑같지 뭐. 잘 지내.” 나의 상황과 다르게, 잘 지낸다는 이야기가 툭 터져 나왔다. 나 역시 그 연예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돌아보니 나 또한 “그냥, 똑같지 뭐. 잘 지내.” 이외의 대답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NOT fine을 안다. 수없이 많은 저스틴이 이야기할 땐 몰랐는데, 종말을 예감하고 발버둥 치던 마음속 클레어가 소리쳤다. “I’m not fine!”
내 마음에 멜랑콜리아 행성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지구는 사악해.
그러니 애석해할 필요 없어.
없어져도 아쉬울 것 없어.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지구의 생명체는 악하다는 거야.
-멜랑콜리아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