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OH TWINS H의 정체
OH TWINS H는 말이 없는 아이였다.
친구들과 있을 때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학원에서는 그랬다.
H 부모님에겐 그런 모습이 걱정거리였던 건지 아이는 결국 상담을 받고 왔다.
제삼자인 선생님이 보기엔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개인의 특성이 부모님들 입장에선 내 아이에게 늦지 않게 해결해 주어야 할 '문제' 정도로 다가오는 것 같다. 사실문제야 만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문제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간혹 가다 부모님들로부터 아이가 잘하고 있는지, 혹여 딴짓이나 장난은 치지 않는지 걱정 섞인 문의 전화를 받을 때가 있다. 대부분은 기우(杞憂)다.
혹여 내 자식이 잘못될까.
지금 이 시기를 놓쳐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까. 조마조마했을 부모님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나조차도 내 새끼(강아지)에게서 평소와 다른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면 전후 사정 생각할 것 없이 온갖 호들갑을 떨며 병원으로 내달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호들갑의 감정은 약자에게서만 나오는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의 과정이다.
부모님의 기우와 달리 객관적으로 아이를 지켜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OH TWINS H는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아이가 전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을 때만 표현을 하고 쓸데없는 자질구레한 표현을 아끼는 아이였다. 그것이 의도를 했던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 절제된 표현이 처음 아이에게 다가가는데 조금은 어렵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한 마디가 두 마디로.
함께 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아이와 나의 유대감도 쌓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말수는 적지만 아이는 말로 다 하지 못하는 표현을 글로 하기 시작했다.
H는 차분한 편이지만 그래도 똥꼬 발랄 초등학생이었다.
녀석 또한 또래 아이들처럼 장난기가 가득했다.
글쓰기를 한 번 시켜보려 하면 장난을 쳤고, 사람의 진을 다 빼게 만들었다. (조용하다고 다루기 쉬운 것은 아니다.)
독후감을 쓸 때 '자신의 처지에서 혹은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이다'라는 식의 내용을 적는 것이 중요한데, H는 그럴 때마다 꼭 쌍둥이 누나인 U를 걸고넘어졌다.
어느새 스며든 이 관계에 U와 H의 미묘한 신경전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H는 사사건건 U에게 장난을 걸었고, 누나 U를 자극했다.
언제나 서로의 점수를 비교했고, 상대의 독후감을 비교했다.
H는 U와 여러모로 달랐다.
U는 기질적으로 섬세하고 소극적이지만 반면에 H는 대범했고 상대의 반응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H와 정반대인 U의 이런 기질과 반응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던 게, 하필 H의 학업 수준이 U보다 월등히 높았다. 그리고 H는 U보다 높은 자신의 점수를 무기 삼아 U를 약 올렸다. 공부만이 전부인 K-문화권에서 쌍둥이 남매의 학업 차이는 서로의 관계에 동등하지 못한 영향을 끼친다.
U와 H는 같은 책을 읽어도 읽는 속도가 몇 배나 차이가 났다. U가 사흘에 걸쳐 읽는 책 분량을 H는 30분이면 다 읽었다. 처음엔 H의 독서 속도와 점수가 요행의 결과라 생각했다. 그래서 H가 퀴즈에서 통과하지 못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야 독서 속도에 제재를 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H는 어떤 책을 줘도 빠르게 읽었고, 너무나 쉽게 통과해 냈다.
이대로 질 순 없다는 생각에, 남들에게 다 허용하는 오픈북을 H에겐 불허했다.
물론... H의 성적에 변화는 없었다.
속독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 할 수 있겠지만 속독을 한 만큼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낸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아이들의 경우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도 책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닌 읽고 난 뒤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줄 아는 것이라 강조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책을 빨리 읽거나 퀴즈를 잘 봐도 곧바로 칭찬을 해주지 않는 편이다.
아직 글 쓰는 게 어색한 나이다 보니 당연히 글을 써 내려가는 것 자체가 서툴거나 어려울 수 있는데 말이나 행동으로도 책의 좋았던 부분과 싫었던 부분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책을 머리로 읽은 것일 뿐이지 마음으로 읽은 것은 아니다.
상당수의 아이들은 본인이 진단을 잘 봤으니 자신이 할 도리는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없어요.'라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않고 단박에 '없어요.'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하는 아이들 대부분은 높은 확률로 어떤 상황에 맞닥뜨릴 때 시야가 좁은 편이다. 오히려 대답이 서툴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이 기억에 남는 페이지를 펼쳐 보이기라도 하는 아이가 글쓰기에 대한 발전 가능성이 더 높은 아이라 생각한다.
U는 읽는 속도가 느리고 퀴즈 시 통과율이 낮았지만 자신의 생각을 글쓰기로 표현하는 데는 선수였다. 질문에서 요구하는 부분을 정확히 잘 집어 글을 썼기 때문에 나는 U의 글쓰기를 높이 샀다. U의 글을 읽어보면 책 내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닌데 늘 퀴즈 점수가 낮아 내내 안쓰러운 마음만 들었다. 그저 아직 문제 푸는 요령이 부족해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H의 책 읽는 속도와 퀴즈 통과율은 학원에서 첫 번째 손가락에 들었지만 글쓰기는 엉망이었다. 하지만 얄밉게도 그것은 글쓰기 능력의 부족이라기보다는 진지보단 장난이 앞선 초등학생이기 때문에 나온 장난의 총체였다.
'잘하는 녀석이 대충 하면 재능 낭비'라는 잔소리를 하며 옆에 앉혀놓고 글쓰기를 시켜도 H는 나의 현란한 갈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장난을 쳤다. 타격감 없는 갈굼에 역으로 약이 오른 것은 나였다.
선생님 입장에선 뭘 시켜도 잘하는 녀석에게 더 어려운 것, 더 힘든 것을 시키며 아이에게 다양한 경험을 시켜보고 싶은 변태 같은 마음이 들곤 한다. 그래서 하루는 H가 읽는 레벨보다 3단계나 어려운 책을 쥐어주며
한계에 부딪쳐 봐야 사람이 성장한다며 다정한 용기의 말을 건넸다.
"통과 못하면 처음부터 다시 읽게 할 줄 알아."
H는 키득거렸다. 대범인 H에게 NPC로 설정된 선생님의 협박은 모기 소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잠시 뒤, 문제를 다 푼 H가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점수는 80점.
마스크 뒤로 웃고 있는 녀석의 표정이 느껴졌다.
애제자가 어려운 책을 통과해 냈건만 나름의 계략이 통하지 않아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통과 못하면 일주일치 갈굼 감이었는데...
싸움에서 승리 한 H는 평소와 다름없이 장난스러운 글을 썼다.
사실 H는 못마땅해하는 나의 표정을 보기 위해 책을 열심히 읽었는지도 모른다.
뭐, 아이가 나로 인해 재미있었다면 그걸로 됐다.
예고 없이 H가 결석했다.
"너 왜 지난주에 안 왔어."
아이가 오자마자 사랑의 말을 건넸다.
"캠프 다녀왔어요."
"무슨 캠프를 가? 영어 캠프?"
"음...." 대답의 버퍼링이 생겼다.
"OO캠프요."
"뭐? 무슨 캠프?"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H가 답했다.
"영재 캠프요."
영. 재. 캠. 프???
네가... 그 유명한 영재???
ㅇ ㅏ... 그랬다. H는 영재였다.
그제야 H의 말도 안 되는 독서 속도와 시도 때도 없이 털어놓은 알. 쓸. 신. 잡이 이해가 갔다.
마치 어남류라고 생각하고 본방사수를 했는데 알고 보니 남편은 택이었던 그런 정도의 배신감이랄까.
"너 그럼 그동안 나를..."
녀석은 말없이 씩 웃었다.
사실을 알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H가 또래 집단의 표준인 줄 알았다. 그래서 누나 U가 더딘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H가 영재였다니. 그동안 H를 표준으로 삼고 뒤처지는 아이들을 채근했던 상황이 미안해졌다. 한편으로는 H에게 더 어려운 것을 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여전히 남아있다.
종이 접기를 좋아하던 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