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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필 Feb 15. 2022

선생님은 죽어도 되지 말아야지

#1 벌써 일 년




아무리 힘들어도 선생님은 하지 말아야지.





전공의 특성상 동기들 대부분 학교 선생님, 학원 선생님, 연구원 등으로 진로를 결정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전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곳에 취업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선생님도 회사 취업도 아니었다.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가.















-역사학과에 합격했어요.

-선생님 하게?


친분이 있던 수학 선생님의 물음이었다.

당시는 입시철이 한창 진행 중인 겨울이었다.

누군가는 합격을, 누군가는 대기를, 누군가는 재수를

같은 고장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의 삶이 달라졌던 것은 그즈음이었다.



당시 극장에는 '색, 계'가 상영 중이었다.

분명 스무 살인데, 졸업 안 한 학생이라고 극장에선 영화를 보여 줄 수 없다고 했다.

몸은 컸는데, 교복 입었다고 정신 연령은 아직 아기란다.

교복 입고 가지 말걸 그랬나.





하고만은 학과 중 취업 안 되는 학과인 역사학과에 원서를 냈다는 나의 말에 선생님은 당혹스러워했다. 선생님의 삶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학생이었으니 선생님 입장에서는 의아했을 것이다.



-아니요. 선생님은 안 할 거예요. 저도 다 알죠. 선생님이 얼마나 힘든지.



내가 다녔던 학교는 적어도 나와 친분이 있던 선생님들은 직장인으로의 선생님이 아니었다. 순수한 열정이 있던 진짜 선생님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 복은 있어서 담임 선생님, 각 과목 선생님, 그리고 학원 선생님은 따뜻한 분들이었다.



물론 전부는 아니었다.


직장인, 먹고살라고, 번듯하니까 선생님을 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내가 학교를 다녔던 그 시절은 체벌 금지에 대한 말이 스멀스멀 나오고 있었던 시기였다. 물론 과도기답게 옛 방식이 남아있는 선생님들은 틈만 나면 학생들을 때렸다. 매가 없으면 손으로.


지금 생각해도 가장 무식한 체벌은 손으로 하는 체벌이다.

몽둥이를 찾으러 갈 정신이 들지 않을 정도로 흥분한 상태니 무난하게 택한 게 손인 거다.


학생이 자신의 억울한 입장을 항변하는데 그것 자체가 괘씸해 선생님은 학생의 귀싸대기를 기어이 때려 올렸다.



군사 독재 시절의 향수에 젖어 있으신 선생님은 잘못을 한 학생뿐만 아니라 잘못을 하지 않은 아이들 모두 단체 생활이라는 명분 하에 기합을 줬다.



하필 제일 중요했던 시기의 담임 선생님이 그랬다.

그래도 원망은 안 한다.

아니다. 조금은 한다. 아니. 아주 많이 한다.




졸업 몇 년 뒤, 그분은 실적을 열심히 쌓아 교감이 되셨고, 부동산 투기에도 성공하셔서 돈도 버셨다고 한다.






그래도 학생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선생님들이 더 많았다.

진심이었던 선생님들은 그래서 상처를 받았다.


중, 고등학생 정도면 그래도 눈치도 빤하고 알건 알아서 짓궂은 남자, 여자 아이들은 유달리 어리고 여려 보이는 신규 선생님들에게 건방을 떨었다. 무서운 선생님 앞에서는 부리지도 못할 배짱을 패악스럽게 부려댔다.




-저는 선생님 못할 거예요.





학생과 선생 간의 미묘한 기싸움이 지겨웠다.

그리고 아이들의 치기를 이해할 만큼 난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아무도 상대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세계로 가득한 다른 차원의 세상.

입시 원서는 역사학과와 국문과에 넣었다. 어차피 어느 쪽을 가든 복수전공을 할 생각이었으니 주 전공이 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나마 갈만한 학교가 그곳이었다.






들어가게 된 학교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었다.



신입생 OT날.

각자의 사는 곳과 고등학교 시절을 이야기하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몇 점으로 들어왔는지, 들어오는 과정은 어땠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기들보다 점수가 높았다.







반수를 할까 했지만 이것 또한 운명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역사학과에 입학, 2학년 때부터 복수전공으로 국문과 수업을 듣게 되었다.




취업이 안될까 트리플 전공으로 경영학을 선택한 동기도 있었다.



나도 그럴걸 그랬다. 후회도 했지만 당시엔 복수전공도 버거웠다. 국문과를 가면 맨날 시 쓰고, 소설 쓰고 문학 작품 분석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 론(論)부터 배운다. 학사 과정이 그렇지 뭐.



내가 생각한 전공과 직접 들어가서 맞닥뜨리는 전공은 넘을 수 없는 차원의 벽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통곡의 벽이라 부른다.




졸업 후 동기, 선후배들은 공양미 사백만 원 이상을 내고 노예로 팔려 나갔다.

팔려간 곳의 이름은 대학원이다.





용케 팔려가지 않은 이들은 나태 지옥보다 더 가혹한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나 또한 그랬다.





-아무리 힘들어도 선생님은 하지 말아야지.




졸업하고 진로에 대한 고민은 많았지만

남들 다 해본 것 이상으로 다 해봤지만

선생님은 되기 싫었다.











-선생님!!!








그랬던 내가 학원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다.



-으이구. 기다려봐.











뿅아리 말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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