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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필 Mar 31. 2022

<모노노케 히메> 자연, 인간 그리고 공존

<모노노케 히메> 감상문




모노노케 히메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중학교 음악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무섭기로 소문난 음악 선생님이 그것도 수업 시간에 만화 영화를 보자고 하신 것은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음악 선생님의 의도는 ‘히사이시 조’라는 천재 작곡가의 OST를 들려주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그것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미야자키 하야오’ 스타일의 스토리텔링과 토속적인 일본 문화 묘사에 마음을 빼앗긴 것을 보면 음악 선생님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 효과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예술가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한 번쯤은 들어봤을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일컬을 때 단순히 그저 그런 ‘애니메이션 작가’로 폄훼하는 것은 문화적 문외한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어렸던 10대 시절만 하더라도 일본 가수, 일본 노래, 일본 문화, 일본 예능을 따라한 콘텐츠가 국내에 즐비했다. 양국의 역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볼 때 그것들 중 가장 탐이 났던 것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이었다. 일본 문화 르네상스를 이끈 그를 평가하는 것조차 범인에게는 주제를 넘는 일이었다. 그는 현재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전설’이다. 오죽하면 일본 내에서도 디즈니 전체가 와도 ‘미야자키 하야오’  한 사람과는 바꾸지 않겠다는 말이 있을까.



  그의 작품들   ‘원령 공주 이례적으로 무로마치 시대를 배경으로  잔인한 시대극이다. 작품 전체를 꿰뚫는 키워드는 ‘공존과 생존이다. 그는 거대한 짐승을 믿는 아이누 신화와 샤머니즘을 이용해  ‘공존과 생존이라는 메시지를 담을 거대한 세계관을 창조해냈다.





  작품은 아직 ‘인간의 욕망’ 이 닿지 않은 조용한 동쪽 마을, 에미시 부족 마을에 ‘재앙 신’ 이 나타나며 시작된다. 재앙 신의 본체였던 먼 서쪽 마을의 돼지 신(나고신)은 인간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재앙 신이 되어버렸고, “어리석은 인간들아. 자연의 증오와 한을 너희가 알겠느냐.”라는 말을 남기며 죽게 된다.




  무분별한 자원의 남용, 탄소 배출로 인한 환경 파괴,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기상이변과 자연재해 등은 인간을 향한 ‘자연(재앙 신)’ 의 경고와 맞닿아 있다. “상처의 독으로 정신과 몸은 썩어가고 고통을 못 이겨 달리는 사이에 원한이 모여 재앙 신이 된 거야.” 에미시 마을 무녀의 말처럼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가고 있다. 즉, 서쪽 마을 사람들과 전혀 상관없는 동쪽 마을의 아시타카에게 가해진 저주는 인간을 향한 자연의 증오가 전혀 상관없는 제삼자에게까지 영향이 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쪽 돼지 신(나고신)의 저주를 받은 아시타카의 팔 또한 시간이 갈수록 그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하고 자연의 분노가 커질수록 그의 멍도 점점 짙어져 갔다.



  우리는  가지 질문을 던질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있는 중재자로 감독은  ‘아시타카라는 캐릭터를 선택했는가이다. 앞에서도 서술했지만 사건과는 상관없는 동쪽 마을에까지 재앙 신이 닥친 것은 폭주하는 자연 앞에 안전지대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감독의 계산이었을 것이다. 감독이 아시타카라는 캐릭터를 내세운 것은 어쩌면 우리가  난제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을 그의 태도를 통해 예시로 보여주기 위해서라 할 수 있다.


  아시타카는 극 중 다른 인간들과 달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를 원망하며 피하지도 않았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위험에 빠진 행인을 구해주고, 모든 일의 원흉인 타타라 마을과 에보시를 구해주는 장면, 총에 맞은 채 죽어가면서도 ‘산(원령공주)’ 에게 꼭 살아남으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 그의 ‘자기희생적 태도’ 만이 자연과 인간과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다른 미야자키 세계관과 다른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캐릭터 중에 ‘절대 악’ 이 없다는 것이다. 혹자는 타타라 마을의 지도자인 에보시를 악인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에보시’는  극의 전반부를 볼 때의 느낌과, 그리고 극의 후반부를 봤을 때의 느낌이 미묘하게 다른 독특한 캐릭터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극의 흐름에 따라 성격이 변하는 ‘입체적인 캐릭터’ 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나 고신으로 인해 사철 생산에 어려움을 겪던 타타라 마을에 혜성처럼 등장했고, 팔려 다니는 생면부지의 여자들을 거두어주었으며, 사람들이 기피하는 나병환자도 자신의 식구로 품는 따뜻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녀는 타타라 마을 사람(인간)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자이자 영웅이었다.

  하지만 사철 생산을 위해 자연(나고신)을 죽이고 숲을 파괴하며 더 많은 것을 욕심내는 장면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사냥한 침략자들의 야만적인 모습 그 자체로 느껴졌다.  본인이 갖고 있는 것을 지키고 더 큰 것을 쟁취하기 위해선 자연을 침략하고 정복하는 것이 그녀에겐 당연한 것이었다.

  핵심은  인간에게 보이는 이러한 이타적이면서 이기적인 양면적 모습이 그녀가 지극히 평범한 ‘인간 군상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에겐 자연(나고신, 들개) 그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데 방해가 되는 존재였고, 그들을 없애는데 혈안이  오히려 같은 인간들에게 자신들의 성이 침략당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이 갈등은 아시타카가 들개들의 도움을 받으며 타타라 마을로 돌아와 무사들의 공격을 받는 인간들을 돕고, 팔이 떨어져 나간 에보시를 품으며 서로 ‘협동과 공존을 통한 생존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극은 끝이 나게 된다.

  흥미로웠던 것은 목이 잘린 사슴 신(삶과 죽음의 신)의 머리를 돌려놓는 장면인데,  ‘결자해지’라는 말처럼 ‘인간(아시타카)’ 과 ‘자연(신의 아이로 상징되는 원령공주)’ 이 한마음 한 뜻으로 힘을 합해야만 자연의 원초적인 상태로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연 없이 살 수 없다. 거친 세상살이에 지쳐 휴식을 떠나는 곳은 바로 자연의 푸르름이다. 인간의 도피처는 결국 자연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품에 안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고 그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정도를 넘어선 무분별한 개발과 그로 인한 환경파괴는 더 이상 자연의 힘만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함께 정화해 나가야 한다. ‘대의를 위한 소’의 희생 정도는 당연시되던 구시대적인 발상은 이제 멈춰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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