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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필 Aug 21. 2022

부이얼이 뭐야?

#6 부이얼 꼬맹이의 등장





첫정(첫情): 맨 처음으로 든 정.






 


 첫정이 무섭다고 했다. 

 부모에게 첫 아이가 특별하 듯, 내게도 애틋한 첫정이 있다.





 앞서 소개한 프린스와 그루트 꼬맹이도 나의 첫정이지만, 이 외에도 몇 명의 '첫정 멤버'가 있다.

오늘은 그중 한 친구에 대해 소개할까 한다.












 녀석의 얼굴엔 '순둥이'라고 적혀있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아인데, 참 순해요." 원장님의 말씀을 듣고 아이를 살폈다.


 첫인상만 보고 함부로 예단하지 않는 편인데, 아이는 한눈에 봐도 조용하고 소심해 보였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아이인 만큼 해당 레벨에서 최대한 쉬운 책으로 골라줬다. 



 아이는 책을 읽는 것도, 진단을 보는 것도 또래에 비해 느렸다. 어휘 시험을 보면 8개 중 절반 이상을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의 소극적인 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내가 보였다. 





 어린 시절의 나도 또래에 비해 느렸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12월 생일 자라 그랬던 건 아닐까 싶지만 나보다 생일이 늦은 친구들 중에 습득력이 좋은 아이들이 있었으니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래보다 느리다 보니 단체 활동을 하면 늘 깍두기나 꼴찌를 면치못했고 그런 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왔다.


 당시엔 학급에서 남보다 뒤처지는 친구를 챙겨주거나 보듬어주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한 명의 부대원 때문에 부대(학급) 전체가 위험에 빠진다는 군대식 교육제도가 만연했던 시대였으니 제 몫을 해내지 못했던 나는 늘 조원들에게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았다.


 그때의 나는 늘 느리고 뭘 해도 잘 따라가지 못하는 스스로가 원망스럽고 조별 활동이 두렵기까지 했는데 요즘 아이들은 비교적 그런 환경에서 학교 활동을 하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경험 때문일까. 남들보다 조금 느린 아이들을 보면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남들보다 느린 게 죄도 아니고, 녀석에게 느려도 괜찮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속도가 존재한다고. 느린 것이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작은 일 하나, 글씨 하나, 그림 하나. 아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칭찬해줬다.

 아이는 느리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하는 일은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것 같아서 아이를 좋아하되, 일정 수준 이상의 좋아하는 티를 낼 수 없다. 아이 입장에선 선생님의 애정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고, 반대로 너무 많은 사랑을 받게 되면 선생님의 마음을 이용해 떼를 쓰거나 응석을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악당마저 귀엽게 그리다니.




 예뻐하는 마음을 조금은 숨기고 있었던 어느 날. 녀석의 어머님이 학원에 방문하셨다.

 책 읽는 것을 싫어했던 녀석이 학원에 다니고부터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고.

 학원 선생님들 중에 이곳 선생님을 제일 좋아한다고.

 









 

 


 아이의 자신감이 높아지는 것만 돼도 큰 성과라고 생각했는데 아이에 대한 사랑이 짝사랑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어른도 이런 소소한 칭찬에 기분이 좋아지는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칭찬을 무럭무럭 먹고 자란 아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있게 됐고, 일 년 반이 지난 현재는 책을 읽는 속도도 진단을 푸는 속도도 또래만큼 빨라졌다. 참 고마운 일이다.




근래 들어 스케줄 변동으로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줄었지만 녀석은 여전히 내 마음속의 첫정이다.


















만남 초기.






 부이얼... 부이얼이 뭘까.

 모처럼 아이가 자신 있게 쓴 글을 첨삭하고 있었다. 아이는 칭찬을 기대하며 나의 반응을 기다렸다.

 아이가 기죽지 않게 재빠르게 부이얼이 뭔지 알아내야 했다. 

 부이얼... 부이얼...

 아이가 쓴 글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 선생님은 본의 아니게 죄인이 되고 만다.

 머리를 굴려봤지만 부이얼이 뭔지 당최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하... 부이얼이 뭘까~? 선생님이 잘 모르겠네~"



아이는 시무룩해하며 대답을 망설인다.



 아뿔싸. 

 나자식... 빨리 생각해내!!! 부이얼이 뭔지. 돌아가라 머리 머리!!!

 

 


 그때 아이가 그려놓은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참 좋아했다... 이정명...




 왜 사모(紗帽)에 고려 말기에서 조선 시대에 걸쳐 벼슬아치들이 관복을 입을 때에 쓰던 모자 KT가 적혀있지...?

아이의 글을 다시 읽어봤다. '모자에 달린 부이얼이 내려와...'




 사모에 부이얼이 달려있어...?

 부이... 얼...부이얼...



 부이얼(VR)?!!!!



 


 요즘 아이들은 R을 '알'이 아니라 본토식인 '얼ㄹㄹㄹrrrrrrrrrr'로 배운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선생님이 이해를 못 해서 미안하다는 말로 아이를 달랬다.

 부이얼(VR)이 글쓰기 도중 나올 줄이야.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부이얼ㄹㄹㄹㄹrrrrrrrrrrr



부이얼 꼬맹이와 내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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