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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현정 Mar 11. 2019

소녀는 어디로 간 걸까 -1화

끝나지 않은 이야기

 아침 7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출근해야 할 일이 없지만 매일 아침 7시 반에 눈을 뜬다는 건 초등학교 3학년짜리가 방학 때 매일 독서실을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든 일이다) 정현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우유와 G7 인스턴트커피를 섞어 전자레인지에 2분을 돌려 카페 라테를 한잔 만드는 것이다. 유지방이 체지방으로 흡수가 잘되는 것 같아 지난주부터는 저지방 우유를 쓴다. 그녀는 카페라테가 가득 든 머그잔을 들고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간다. 올 겨울은 그다지 춥지 않았지만 겨울 아침의 서늘한 공기가 아직 서재에 깔려있다. 정현은 서재에 들어가기 전 이미 양말과 두꺼운 조끼를 꺼내 입었다.


 소설을 쓰기 위해 엉덩이와 의자가 친해져 보자고 결심한 지 어언 7개월 하고도 10일이 흘렀다. 정현은 37살에 비로소 찾아온 그녀의 꿈을 좇는 중이다. 대기업 과장직을 때려치울 때는 이미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후였다. 소설가가 되고 나서 직장을 그만둘 수도 있었지만 쥐꼬리만 한 월급 이외에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한 직장 생활을 더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신인 소설가 등용문인 미라보 소설 출품일이 다음 달로 예정되어 있었고 정현은 소설의 마지막 결론 부분을 쓰는 중이었다. 원고를 다 쓰더라도 퇴고를 최소한 세 번은 하려고 하기에 출품 예정일이 너무나 빠듯했다.


 정현의 서재 오른편에 할머니가 쓰셨던 작은 경대가 있다. 할머니가 시집왔을 때 혼수로 해온 물건이니 60년이 훌쩍 넘은 고가구다. 경대 치고는 다리가 길어 앞에 섰을 때 엉덩이 위로 반 전신이 보이고 붉은색 페인트가 빼곡한 자개장식과 잘 어울려 드라마 황후의 품격에서 태후전에 어울리는 화려한 디자인이다. 어찌나 반들반들 관리를 잘했는지 경대 다리 쪽 하얀 흠집 두어 개 빼고는 고급 앤틱 가구로 손색이 없다. 정현은 커피를 마시면서 경대위에 세워진 거울을 흘끔 보았다. 보통은 경대의 각도가 정현의 왼쪽 벽을 향하고 있어 벽에 걸린 그림이 주로 경대의 거울에 비쳤다. 그런데 정현이 흘끔 본 경대 속 거울에 시커먼 털 뭉치 같은 게 보였다. 이 털 뭉치는 빠른 속도로 거울 전체 크기만큼 스스로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정현은 눈을 부릅뜨며 거울을 응시했으나 그녀가 쥔 머그잔은 사시나무 떨리듯 좌우로 흔들리며 책상 위로 커피가 쏟아졌다.


 정현은 쏟아지는 커피를 쳐다볼 겨를도 없이 정체모를 검은 물체에 시선을 고정했다. 눈을 깜박이지 않은 채 3초가 흘렀고 정현은 이제 거울을 꽉 채운 검은 물체가 더 이상 커지지 않고 우리에 갇혀 고통스러운 문어처럼 꿈틀대는 것을 바라보았다. 정현은 홀린 듯 이 검은 물체를 거울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거울 밖으로 튀어나온 줄 알았으나 이것은 분명 거울 안에 갇혀 있었다. 손을 뻗어도 그 물건에 닿지를 않았다. 조금 더 힘을 주어 팔 전체를 쭉 뺐다. 차가운 금속에 닿는 느낌도 잠시 마치 검은 안갯속에 손을 뻗는 듯 허공 속에 빠진 손은 안으로 계속 빨려 들어갔다. 무엇을 집으려 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손, 손목, 팔꿈치는 검은 안갯속에 휘감겨 들어갔다. 다음으로 오른쪽 어깨와 머리가 빨려 들어갔고 이 커다란 빨간 경대 안으로 정현의 몸통과 발이 순서대로 서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정현은 아직까지 한 번도 눈꺼풀을 깜박이지 않았으나 동공은 점점 커져 작년에 하늘나라에 간 고양이의 눈망울만 해졌다. 그녀는 경대 거울을 통해 들어간 반대의 공간이 파란색이라는 것과 현재 두둥실 떠있음을 느꼈다. 중력이 없는 이 곳은 깊은 바닷속과 같이 발과 팔을 허우적대지 않으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숨을 쉴 수가 있었으며 공기는 따뜻했고 정현이 허우적댈 때 미지의 허공에서 싸구려 차량 방향제의 냄새가 났다.


 희성은 평소 7시에 기상하던 습관대로 정시에 눈을 떴다. 창립기념일인 오늘은 목요일인 터라 금요일 휴가를 내 연장 나흘을 쉬려 했으나 권상무의 눈치로 감히 금요일 휴가 계를 제출하지는 못했다. 희성은 내년도 사업계획 때문에 연장 밤 10시까지 야근을 했기에 따뜻한 이불속에서 꿀 맛 같은 휴식을 몇 분 더 만끽했다. 더욱이 오늘은 정현과 달콤한 데이트가 있는 날이다.


 정현이 퇴사를 결심하던 날이 희성이 데이트를 신청한 날이었으며, 공식적인 커플이 된 날이기도 했다. 희성의 옆 팀에 근무하던 정현은 다른 팀과의 조인트 회식 때 처음 알게 되었다. 지나가면서 목인사를 하던 사이에서 그날 속 얘기를 털어놓는 사이로 급격히 발전했다. 정현이 소설가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퇴사를 고민했을 시점이었는데 그녀가 소주 한 병 반을 마시고 주저리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을 때 우연히 희성이 옆자리에 있었던 것이었다. 그날 희성은 나이가 적지 않은 정현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반하고야 말았다. 그녀는 희성보다 한 학번 위였다.


 연일 야근으로 정현을 본지 일주일 하고도 나흘이 되었다. 정현이 다음 달 소설 마감을 앞둔 터라 오늘 데이트 시간을 간신히 확보했기에 희성은 오늘 낮에 개봉하는 영화를 빠르게 스캔했다. 정현에게 골라둔 영화 제목을 카톡으로 보냈다.


-오늘 이 영화 같이 보면 어떨까. 조조영화 보고 그 옆에 새로 생긴 태국 음식점 가서 점심 먹을까? 연락 줘.


-메시지 아직 안 읽었네? 오늘은 늦잠 자나?


-조조영화 1시간밖에 안 남았어. 연락 줘."


-연락 줘.


-무슨 일 있어?


 11시가 훌쩍 넘었다. 정현이 연락이 안 된다. 핸드폰은 안 받고 집 전화는 아예 없고 정현의 친구들은 아직 만나본 적이 없어 이렇다 할 연락책이 없다. 희성은 11시 반 정현의 집으로 나섰다. 방 두 개가 달린 정현의 오피스텔은 희성이 살고 있는 곳과 그리 멀지 않았다. 희성은 15분 후 정현의 오피스텔 현관 앞에 서있다. 계속 벨을 눌러도 안에서 인기척이 없다. 하는 수 없이 현관 키 비밀번호를 눌렀다. 지난달 정현의 이사를 도와주면서 우연히 곁눈으로 본 번호들을 두세 번 조합해서 눌러보니 현관이 철컥하며 열렸다. 볕이 잘 안 들어오는 오피스텔 안의 공기가 서늘했다.


"정현아~ "


 집안 내부는 헝클어짐이 없는 것으로 보여 강도가 든 것 같지는 않았다. 침대 방을 지나 곧바로 서재로 향했다. 문이 반쯤 열려있는 서재에는 책상 위 노트북과 독서등이 켜져 있었고 오른쪽에 놓아둔 머그잔 주변으로 미지근해진 커피가 흘러있었다. 그 옆에 핸드폰은 무심히 뒤집어진 채 부재중 전화 알림 등을 깜박이고 있었다. 희성의 오른쪽 시야에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정현의 서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빨간 앤틱 경대로 그의 시선이 쏠렸다. 경대 위에 올려있는 커다란 거울 속 검은 형체는 빠른 속도로 커졌다. 희성은 놀란 입을 살짝 벌린 채 경대 앞으로 다가갔다.


 검은 물체 밖으로 하얗고 긴 손가락이 쑤욱 빠져나왔다. 희성은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이내 두 손이 나와 경대의 가장자리를 잡고 팔에 붙은 몸을 끌어당기듯 힘들 주었다. 이어서 정현의 머리가 나왔고 희성은 정현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팔을 잡고 그녀를 몸 안쪽으로 당겼다. 그대로 희성에게 딸려온 정현은 희성에게 안겨 눈물을 쏟았다. 그녀의 가지런한 단발은 흐트러져 얼굴의 반쪽을 가렸지만 볼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거울로 들어갔을 때 복장이었던 듯 맨발에 잠옷 차림도 깨끗했다.


"어떻게 된 거야! 저 이상한 거울에서 나온 거 맞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다친 데는 없고?"


"나 지금... 여기... 있는 거 맞지?"


"응. 네 서재 방이야. 너한테 연락이 계속 안 되기에 집으로 찾아온 거야. 저 거울은 저주받은 거야? 아까 그 시커먼 건 또 뭐고. 와 완전 대에박이다. 나 진짜 소름 돋았어."


"오늘 며칠이야?"


"며칠이긴 오늘 2월 4일이지. 2019년 2월 4일 오전 11시 25분."


"아아... 현재로 돌아왔구나."


정현은 희성의 목을 끌어안고 한 번 더 조였다.


"희성아. 나 네가 아는 정현이 맞지? 여기 살아있는 거지? 아. 진짜 꿈꾸다 온 것 같은데 그건 꿈이 어니였어. 그 모든 게 다 진짜였다고."


희성은 정현을 부축하여 거실로 나왔다.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정현의 머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한 손으로 손을 잡아주었다.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기해봐."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정현은 이야기했다.


"내가 다 얘기해줄게. 이거 꿈이 아니였어. 믿어줘."


그녀는 주머니 속에 메모지가 있는지 손을 넣고 확인했다. 역시나 그대로 있다.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가 다 끝난 시간은 이미 해가 뉘엿뉘엿해졌을 때였다.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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