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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현정 Mar 11. 2019

소녀는 어디로 간 걸까 - 2화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정현은 이 우주와도 같은 공간에 빨려 들어 간 후 이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믿을 수 없어 두 눈을 마구 비볐다. 공중에 떠있는 채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영을 하듯 두 발을 허공에 대고 차는 동작을 해야 했다. 이대로 이렇게 이상한 세계의 미아가 되어 생을 마감하는 건가 절망 속에 가슴이 답답해 왔다. 번뜩 들어왔던 검은 입구로 되돌아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되돌아보았으나 이미 흔적조차 없었다.


 정현은 가끔 발을 허우적거리며 이 무중력 공간이 도대체 무엇인지 보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었다. 분명 끝없이 파란색의 하늘과도 같았는데 왼쪽 방향에서 희미하게 초록색 빛이 반짝였다. 정현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초록빛이 나는 곳으로 팔과 다리를 버둥거렸다(수영 동작 중 평형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가서 가까이 보니 초록색이 발광하는 얼굴 사이즈만 한 원이 있었다. 개구리 알처럼 반투명한 모습이었고 가운데 이중 원의 형태가 비쳤다. 잠시 후 이 초록 원은 서재의 검은 원처럼 회오리 모습으로 바뀌면서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정현은 손을 뻗었다. 어디가 되었든 이 곳만은 빠져나가야 했다. 이 곳에서 홀로 부유하며 굶어 죽을 순 없었다. 초록 원은 정현을 빨아 당겼고 정현은 조금은 능숙하게 초록 원 너머로 몸을 미끈하게 빼내었다.


 그녀가 몸을 빼내 온 곳은 텁텁한 흙냄새가 풍겼고 무언가 굉음과 함께 타는 듯한 소리 났다. 눈을 떠 주변을 살피니 정현은 흙 길 위에 누워있었고 인근에는 불에 활활 타고 있는 전복된 차가 보였다. 차는 180도 뒤집힌 상태였고 앞쪽 창문을 뚫고 남자의 머리가 반쯤 나와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는 생각과 동시에 무릎과 어깨에 강한 통증을 느꼈다. 정현은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다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원래의 몸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작아졌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제발, 이건 꿈이어야 해.'


정현은 자기가 엄청난 차량 전복사고를 당했음을 인식하며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살짝 눈을 떴을 때 병원 침상에 누워있다. 약 냄새가 풍기고 시야가 아직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 곁에서 의사와 어떤 노인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큰 사고에서 살아남다니 이건 기적입니다. 현재 갈비뼈 두 개 금이 간 것과 찰과상이 조금 있을 뿐 건강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현재 마취 중이나 이삼일 내에 퇴원 가능합니다."


"아이고. 저 어린것 불쌍해서 어쩌나. 지 아부지 따라가지 않아 얼마나 감사한지요. 불쌍한 내 새끼."


그녀는 회한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곧이어 희미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현은 스르르 다시 잠에 빠졌다.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떤 낡은 방 안이었다. 오래된 나무 냄새와 오징어 냄새가 살짝 배어 나왔다. 정현은 눈을 떴다. 방안은 단출하게 옷걸이에 옷가지 몇 개가 걸려있었고 중간 사이즈 화분 두 개와 벽에 걸린 사진 액자가 보였다. 사진 속에는 정현의 아빠와 엄마의 약혼 때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정현의 머리맡에 익숙한 커다란 빨간 경대가 보였다.


'아. 여기가 어디였더라...'


풍경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방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할머니다.


"내 새끼 정신이 들었니? 몸은 좀 어때.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


할머니는 연신 눈물을 닦으며 정현을 쓰다듬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검은 머리에 입가 주름만 조금 있고 아주 정정해 보였다. 정현은 5살 때 아빠가 사고가 나던 날로 되돌아간 것임을 깨달았다. 성인인 정현은 그 자동차 사고를 전혀 기억을 못 했다. 돌아가신 할머니한테만 들었던 이야기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심지어 살아생전 아빠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아 아빠 사진을 보면 어색하곤 했었다. 정현은 바로 그날로 되돌아 간 것이었다. 할머니는 기쁨과 슬픔, 반가움과 동정이 섞인 뜨거운 눈물을 훔쳤다. 할머니는 아직도 검은 머리에 입가 주름만 조금 있고 아주 정정해 보였다.


'요망한 것이... 느그 엄마는 너 태어나자마자 임신 중독증으로 가버렸는데 어찌 너는 느그 아빠까지 잡아먹었냐.'


어릴 때 정현의 기억 속 할머니는 늘 자기를 엄마 아빠를 잡아먹은 아이로 치부하고 원망하였었다.


'사고가 난 오늘 하루만큼은 나를 가여워했었나 보네.'


 정현은 전복된 차의 차창 밖으로 흉하게 튀어나온 남자의 뒤통수를 떠올렸다. 온몸의 털이 솟으며 몸서리가 쳐졌다. 어린 나이에 그 장면을 목격했다면 충분히 기억 속에서 지우도고 남을 충격적인 장면이다.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가기가 버거웠을 것이다.


 할머니는 전부터 지역에서 꽤 유명한 요정집을 운영했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아가씨들이 예쁘다고 소문이 나 거물급 인사 중 소수만 단골로 드나들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할머니를 도울 무렵에는 가게가 많이 쇠락했다. 그 일대에 훨씬 규모가 큰 요정집이 두 개나 들어서는 바람에 예쁜 아가씨들이 웃돈을 받고 바퀴 바람 빠지듯 하나둘씩 다 옮겨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끝까지 의리를 지키며 요정에 남았던 마지막 아가씨가 정현의 엄마였다.


 그날부터 정현은 할머니와의 기약 없는 동거 생활을 다시 시작하였다. 지난날 할머니와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함께 사는 동안 정현에 대한 무자비한 원망으로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고를 다시 경험하게 된 두 번째 동거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정확히 오전 10시 반에 집을 나서서 가게로 출근하셨고 저녁 8시에는 퇴근하고 돌아오셨다. 우리는 늦은 저녁을 먹었지만 한 번도 저녁을 거른 적은 없었다. 정현은 다니던 유치원을 치료를 명목으로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과 집 주변에서 보냈다. 하루 종일 할머니의 경대를 쳐다보며 검은 원이 생기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어느 일요일 낮이었다. 정현은 미세먼지가 없는 봄 날씨를 즐기며 근처 놀이터에서 몇 시간을 보낸 후 빗방울을 피해 집으로 왔다. 빗줄기가 세차 지며 흙냄새가 창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정현아 창문 닫아라. 비 들어온다."


정현은 젖은 옷을 벗고 샤워를 한 후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혼자 목욕도 잘하고 옷도 잘 갈아입네. 혼자될 걸 알았던 것처럼 이리 잘하냐 어째."


칭찬인지 원망인지 모를 소리를 듣고 정현은 요를 깔고 누웠다. 봄날 빗소리를 들으며 노곤한 오후를 보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잊고 살아온 정현은 혹시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이대로 그냥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잠시 감흥에 젖었다. 눈을 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할머니의 작은 혼잣말이 들렸다. 정현은 실눈을 뜨고 상황을 살폈다. 경대 앞에 할머니가 다소곳이 앉아 넋두리를 하고 있었다. 아마 정현이 깊은 잠에 빠졌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정현애비야. 니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연우(정현의 엄마) 만났냐. 봄에 태어나서 꽃처럼 예쁘다고 그렇게나 좋아하던 니 마누라 만나 행복허냐. 평생을 바보 천치처럼 한 사람만 알고 그리 짝사랑하다가 결혼해서 애까지 낳았으면 억울해서라도 둘이 100년은 해로했어야지. 이게 모꼬.

연우야. 이 세상천지 불쌍한 것아. 그리 꽃 같이 이쁘게 태어나서 지지리 고생만 하고 간 이 불쌍한 년. 내는 누더기 엄마 옷 걸치고 가방 하나 들고 찾아와 그 큰 눈에서 눈물이 그렁하니 맺혀서 니가 했던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데이. 내를 보고 하루만 먹여달라고 얘기했었지. 눈에는 눈물이 고였지만 니는 참 당당했었데이. 19살 어린 아가 무슨 고생을 이리 해왔었길래 이리 당찬가 했었지. 니가 그리 이를 악물고 여서 일을 하면서도 내는 니가 그 눈빛을 잃지 않아서 참 좋았데이. 내는 니가 내를 목숨 살려준 은인으로 평생을 모시겠다고 하고 내를 친엄마처럼 살뜰히 챙겨준 거 참 고마웠데이. 이 빙신이 그렇게 돈 벌어서 첫해 받은 돈의 절반을 털어 이 고급 경대를 사 갖고 왔었제. 내가 그날 니한테 얼마나 화를 냈던지. 그래도 연우야 이 경대를 보는데 니 같아서 내 이렇게 넋두리를 한데이. 니가 내한테 선물한 날 그리 욕먹으면서 니가 얼매나 기뻐했냐.


인자 임자 만났으면 좀 더 살아보지 그랬냐. 내 아들이 그렇게 니 좋다고 그랬는데 그냥 좀 더 살아내지 그랬냐. 니가 여그 오기 전에 출산했던 것 땜시 니가 또 임신을 하면 안 됐었는데. 이 미련한 것아 어쩌자고 임신을 또 해서. 니 그리 가고 정현애비가 니 따라 간거래이."


할머니는 이윽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느끼는 소리는 거의 울부짖음으로 바뀌었지만 소리를 죽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정현은 ‘여기 오기 전 출산했던 것 때문에 임신을 하면 안 됐었다’는 이야기에 자기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할머니가 어깨를 들썩이는 게 보여 눈을 다시 질끈 감았다.

(3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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