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 날 정현은 뜬눈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와 무엇보다 자기에게 배다른 오빠가 있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30 평생이 허리케인에 휘감겨버린 듯 어지럽게 들렸다. 그 사실을 알고 자기 아들을 기꺼이 내어준 할머니에게도 궁금한 게 많아졌다.
월요일 새벽 6시. 정현은 이부자리를 걷어차고 벌떡 몸을 세웠다. 그리곤 옆에 곤히 잠들어 있는 할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할머니 나 할 말 있어요."
"무슨 일이야. 이 새벽에. 더 자라."
"할머니 중요해요. 좀 일어나 보세요."
정현은 어제 오후에 잠든 척하며 들었던 이야기를 꺼냈고, 조심 스래 엄마의 또 다른 아이에 대해 물었다.
"내가 괜한 허튼소리를 해서. 아이고 정현이 많이 놀랐겠구나. 할미가 너 더 크면 이야그 다해줄 거야."
"아니야 할머니. 지금 해줘요. 지금."
할머니는 물주전자에서 물을 한잔 따라 마시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애미가 합천에서 19살에 나를 찾아왔었지. 그때는 몸을 푼 지도 얼마 안 돼서 얼굴도 많이 붓고 했었지. 그때만 해도 우리 가게가 정말 컸었는데...아가씨들도 많았고. 처우가 좋은 편이라 그때 시골에서든 서울에서든 얼굴 반반하고 사연 있는 처자들이 많이들 찾아왔었어. 내가 어지간하면 그런 사연 있는 아가씨들은 차비 주고 전부 되돌려 보내는데 연우는 좀 달랐다. 그 눈빛이 어찌나 당차고 강한지 얼굴은 팅팅 부었는데 아주 야무지게 손동작을 해가며 가게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드라. 아니 당장이라도 그냥 그렇게 할 태세였지. 다른 아가씨들처럼 붙들고 매달리고 하지도 않았어. 연우는 묻지도 않았는데 4개월 전에 출산을 했다고 했지. 합천으로 내려온 지방 공무원이랑 교제를 했는데 덜컥 임신까지 시켜두고 남자네 집에서 아이만 챙겨가고 둘을 완전히 갈라놨다 하데. 남자 놈도 나이가 스물넷 밖에 안 된 어린놈이었고.
우리 가게에서 한 두어 달은 내가 쉬게 했지. 몸은 제대로 추슬러야 될 거 아냐. 아들 이름이 ‘희’ 머시기였는데 까묵었제. 그 놈팽이는 미스코리아 출신 만나서 결혼했다더니만. 결혼할 때 그 집서 연우한테 애 찾을 생각 말라고 매몰차게 했다지. 위로금으로 봉투 좀 챙겨주고. 그 돈을 쓰질 못해서 이 경대를 이 비싼 경대를 나한테 사줬지. 아. 생각났네. 이름이 ‘희성’이었제. 그 아들 이름이. 니보다 두 살 오빤께 7살이겠구먼..."
할머니가 이야기를 마치고 부엌으로 가 아침을 준비했다. 밥상머리에 앉은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따뜻한 북엇국을 불어 마셨다. 할머니가 출근을 하고 정현은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빈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설령 현재의 세상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정현은 엄마 아빠의 이야기 그리고 배 다른 오빠인 희성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5살 정현은 아직 손이 여물지 못해 글씨를 잘 쓸 수가 없었다. 메모의 형식으로만 적었다. 희성... 남자 이름으로 흔하지 않은 이름인데 과연 우연일까 하는 의심은 계속된 채 마음이 심란하였다.
바로 그때. 경대 속에서 불은 색 원이 보였다. 처음엔 거울에 비친 할머니의 옷일 거라 생각했는데 원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정현의 방에서 보았던 검은 원과 같은 움직임에 정현은 벌떡 일어나 가까이 갔다. 빨간 원이 충분히 커질 때 정현은 두 팔을 뻗었다. 이제는 익숙한 듯 몸을 자연스레 원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할머니 이야기를 메모한 종이를 주머니에 넣는 건 잊지 않았다.
정현은 그 우주와 바다를 섞어 놓은 공간에서 헤엄치 듯 떠있다. 정현은 초조해하지 않고 차분히 어디선가 반짝일 빛을 기다렸다. 저 멀리 오른쪽 2시 방향에서 노란빛이 반짝였다. 정현은 거침없이 헤엄쳐서 노란빛까지 빠른 속도로 왔다. 빛을 만지는 순간 정현은 또다시 빨려 들어갔다. 순간 그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소설이 아니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현이 노란빛을 넘어 도착한 곳은 그녀의 서재가 아니었다.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커다란 고속버스 안이었다. 그녀는 청조끼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5살 보다는 성숙한 몸을 갖고 있었다. 정현의 주변 자리는 시끌벅적했다. 의자에서 반쯤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수학여행 가는 풍경이다. 노란빛은 중학교 3학년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던 시간으로 그녀를 데려다준 것이었다. 당시 유행했던 청조끼를 입고 싶어 수학여행 며칠 전부터 할머니 심부름을 하면서 용돈을 모았던 기억이 새록새록했다.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유진이와 저 멀리 미진이의 얼굴이 보였다.
(아. 친구들아. 지금은 어디서 뭐 하고 있니.)
고속버스는 30분가량 운행을 하고 휴게소에 진입했다. 이제 경주까지 두어 시간밖에 남지 않아 휴게소에는 수학여행을 가는 차량들이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정현아 휴게소야. 내리자."
"으응. 그럴까."
정현은 쭈뼛거리며 웅성이는 그룹에 섞여 차에서 내렸다. 공기가 맑고 산뜻한 게 싱그럽기까지 하다. 정현은 그룹을 이탈하여 살며시 화장실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우선 화장실에 가서 본인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화장실 거울에서 검은 원이라도 나왔으면 하는 심정으로 여자 화장실 앞 근처에 도달했을 때 어떤 남학생이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남학생의 옆모습을 보고 소스라쳤다.
(희...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