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이야기
(검은색이라면.... 어쩌면 되돌아 갈 수 있겠구나.)
원이 충분히 커지길 기다렸다가 손을 뻗어 원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물론 이제껏 기록한 메모를 주머니에 넣는 건 잊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되돌아왔다.
희성은 정현의 이야기가 끝날 때쯤 탈진한 상태가 되었다.
물질적으로는 늘 풍족했지만 어머니의 차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던 그 시절. 희성은 한글을 깨칠 무렵 본능적으로 낳아준 친어머니가 아닐 것을 알았다. 언제나 아름답고 우아한 미소를 지어주었지만 그를 단 한 번도 혼내거나 궁금해하지 않았다. 심지어 초등학생 때 친구들과 편의점에서 재미로 물건을 훔친 게 걸렸을 때에도 그에게 꾸지람을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슬리퍼나 밀대로 맞거나 무릎을 꿀린 채 담임 앞에서 자아비판을 시키는 등 서로 혼난 것을 배틀하며 학교 전체가 편의점 절도사건으로 한때 난장판이 되었었다. 그러나 희성의 어머니는 싸늘한 웃음을 한번 지었을 뿐 희성에게 단 한마디 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런 희성을 부러워했다. 얼굴도 그렇게 예쁘신 엄마가 성격도 좋으시다고. 그 후에도 희성은 다양한 방법으로 어머니에 대한 테스트를 계속했다. 어머니는 한결같았다.
아버지는 미스코리아 출신 어머니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바람을 피웠다. 서울로 발령 난 후 고위공무원으로서 탄탄대로를 밟아왔지만 집안은 바람 잘날 없이 시끄러웠다. 몸매가 망가진다고 아이를 더 낳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결단이 아버지의 바람기를 부채질했다. 가끔 희성을 불러 어깨를 토닥이며 용돈으로 수표를 주셨던 아버지였지만 그에게 아버지는 용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최소한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정현이 이야기처럼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오셨단 게 사실일까. 그는 가끔 담임이 자기를 불러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던 걸 기억했다. 그리고 담임이 희성의 나이가 원래는 세 살 더 위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얘기했던 게 확실했다. 덕분에 나이 많다고 학교 내에 소문이나 희성은 친구들과 더 멀어져야 했지만.
그는 중학교 때 경주로 간 수학여행을 떠올렸다. 그의 기억 속엔 불국사 벤치에서 만난 중학교 여학생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버거킹에서 다시 한번 만났다고 하는데 학창 시절 즐겨 찾던 곳은 맞았으나 정현을 만난 기억은 없다. 두 번 만났다면 분명 떠올랐을 법한 내용이다. 희성은 SF영화를 떠올리며 과거의 기억이 바뀌었을 때 순식간에 현재의 기억이 리셋되는 플롯을 생각하며 말했다.
"나 너를 만났던 기억이 없는데. 전혀 없어 그런 기억."
"아. 그렇구나. 그렇다면 이걸 봐봐."
그녀는 주머니 속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메모지 두 장이 까만 글씨로 빼곡하였다. 접었다 폈다를 많이 해서 너덜너덜했지만 정현은 조심스레 펼쳐서 희성에게 건넸다.
"다시 나를 만나게 된다면 네가 이걸 보여 달라고 했었어. 이건 모두 사실이야. 내가 기억해내지 못한 사고의 현장으로 되돌아가면서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어. 이야기의 열쇠는 그 사고였던 거지."
희성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 정현과의 관계. 친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머릿속이 쑥대밭이 되었다.
"정현아. 좀 쉬어. 생각할게 많아서 나는 가봐야겠어. 확인도 좀 해봐야겠고."
"그래. 나도 좀 자야 될 것 같아."
정현은 눈꺼풀이 밀려 땅으로 꺼질 것처럼 졸음이 왔다. 희성이 가고 다음날 아침까지 꼬박 열네 시간을 내리 잤다.
아침 7시 반. 우유와 G7 인스턴트커피를 섞어 전자레인지에 2분을 돌려 카페 라테를 만든다. 유지방이 체지방으로 흡수가 잘되는 것 같아 정현은 저지방 우유를 쓴다. 카페라테가 가득 든 머그잔을 들고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간다. 정현은 서재에 들어가기 전 이미 양말과 두꺼운 조끼를 꺼내 입었다.
컴퓨터를 켜고 아래 한글 새문서를 연다. 새하얀 백지에 그녀는 작은 글씨들을 새겨 넣기 시작한다.
<미라보 문학 출품작>
제목- 소녀는 어디로 간 걸까
작가- 김정현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