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 무렵까지 정현의 할머니는 일주일에 세 번 가게에 나가고 있었고 이사를 가지 않아 정현은 큰 문제없이 집으로 찾아갈 수 있었다. 할머니 연세도 있으시고 가게 운영도 더 힘들어진 상태라 집의 형편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가구며 세간살이 모두 정현의 5살 때 있었던 물건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더 이상 할머니와 방을 쓰지 않았고 창문이 없는 침대 방을 혼자 사용하고 있었다.
(맞아. 이 곳이 내가 처음 갖게 된 방이었지.)
책상 하나와 침대만으로도 꽉 찬 방이었다. 당시에는 이 방이 그렇게 크고 좋아 보일 수 없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책 꽂을 공간도 빡빡한 작은 책상에 싱글 침대가 세로로 딱 들어가고 남은 공간은 한 명이 다리를 뻗고 앉을 수 있는 정도다. 책을 좋아했던 정현은 부족한 책꽂이 때문에 책상 위 한쪽에 책을 탑처럼 세워놓았다. 그래도 침구류 색이 화사한 핑크색이라 정현은 이 공간을 무척 좋아했었다.
동진중학교는 강 건너 강남 팔 학군에 위치한 학교다. 워낙 학군이 좋기로 유명한 고등학교와 함께 있는 중학교라 정현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정현은 오후 수업을 땡땡이치고 일찌감치 동진 중학교 앞으로 왔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약 30분 후 남자아이들이 벌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남자 중학생들은 거친 욕설을 하면서 친구들과 희희낙락 거리며 정현의 옆을 스키고 지나갔다. 선두에 나오는 그룹 바로 뒤에 이어폰을 꽂고 외따로 떨어져 슬렁슬렁 걸어가는 희성의 얼굴이 보였다. 멀리서 봐도 워낙 잘 보이는 이목구비였다. 정현은 조심스레 희성의 뒤를 밟았다. 그는 10여 분 간 걸어서 커다란 버거킹 매장으로 들어갔다. 한쪽 구석에 가방을 집어던져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주문을 하러 카운터로 갔다. 정현은 그의 대각선 방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거킹 매장에는 이미 소년들의 그룹으로 점령당한 테이블이 몇 개 있었다. 한 테이블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성이 저 새끼 혼자 왔네."
"아 그 재수 없는 놈 왔어?"
"저 새끼 우리보다 나이 세 살이나 많잖아. 나이 쳐 먹었다고 엄청 으스대는데 꼴 같지 않아."
"저 새끼 엄마가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며? 지난번에 학교에 왔었는데, 와 진짜 대박이드라."
"와. 진심 부럽다."
"근데 엄마랑 나이 차이가 스무 살 밖에 안 난데. 그게 말이 되냐? 미스코리아 출전하기 전에 애를 낳았을 리 없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 그렇다고 애 낳기 전에 고등학생 때 출전했을 리 없고."
"그렇지. 그러니까 그 미스코리아는 저 새끼 친엄마 아냐."
"진짜 그러네? 미친 새끼 졸라 똑똑해."
"야. 저 새끼 온다. 조용해."
정현은 그들의 험담에 빠져들어 있다 희성이 오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이런 세상에나..)
그녀는 메모지와 펜을 꺼냈다. 어느 순간부터 이 과거로의 타임머신 여행에서 알게 이야기를 적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한겨레 100일 글쓰기 수업으로 훈련한 효과를 보는 듯했다.
(희성은 학교는 몇 년 늦게 갔고 현재의 엄마와 20살 나이 차이가 난다.... 역시 그가 맞았어.)
그녀 앞에 툭하며 뭔가가 던져졌다. 커다란 남색 가방이었다. 희성은 맞은편 의자를 쭉 빼 그녀 앞에 거칠게 앉았다.
"너 뭐냐. 경주에서 봤던 애 아냐? 여기서 뭐 하고 있냐."
"아..... 안녕하세요."
"강. 북. 여자중학교?"
그는 정현의 가슴에 새겨진 학교 이름을 읽었다.
"이 시간에 그 멀리서 여기까지 왜 온 거냐. 그건 또 뭐고."
그는 내 메모지를 흘낏 보았다. 그녀는 손으로 잽싸게 메모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으면 기록해 놓는 거예요."
"나중에 작가라도 되시게?"
"네.. 저는 작가가 될 거예요. 소설가."
"아직 중학생인 주제에 무슨 소설가가 되겠다고.."
그는 커다란 와퍼를 우걱거리며 씹었다. 소스가 흘러내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햄버거를 다 먹고 콜라를 원샷으로 마신 후 그는 말했다.
"나 간다. 야. 한 번만 더 내 근처에 있다 만나면 너 그거 나한테 보여줘."
정현은 흠칫 놀라 주머니 입구에 손을 가져갔다. 희성은 이어폰을 꽂고 가방을 한쪽에 맨 채 훌쩍 자리를 떴다. 그녀는 순간 희성이 음악을 플레이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친구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외면하고 싶어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는 척 해왔던 것이다. 한창 사춘기 시절 친구들의 수군거림과 또래들보다 많은 나이.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클까 싶어 정현은 마음이 미어졌다.
그 후에도 정현은 먼발치에서나마 희성을 보고 싶어 여러 번 학교 앞으로 찾아갔다. 희성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혼자 학교를 빠져나와 주로 버거킹이나 근처 PC방으로 향했다. 어느 날은 정현이 주로 숨어서 지켜보는 에디아 커피숍으로 오는 바람에 여자 화장실에 숨어 있던 적도 있다. 그렇게 희성을 몇 번 관찰할 때 정기적으로 어떤 남자가 학교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키가 크고 훤칠했는데 고급 슈트에 반들반들한 가죽 구두에 황토색 가죽 가방을 들었다. 방과 후 학생들이 거의 빠져나갈 무렵 학교로 들어갔는데 어느 날은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샤프한 턱선에 정우성의 눈과 코를 닮았다. 희성보다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이었지만 누가 뭐래도 희성의 아버지였다.
(희성 아버지가 학교엔 왜...)
거울이 다시 열린 건 그로부터 3주가 흐른 뒤였다. 할머니는 동네 친구분과 제주도 여행을 가서 집에 안계서 정현은 마침 혼자 집에 있었다. 정현은 경대의 거울에서 작은 검은 원이 서서히 커지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