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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현정 Mar 20. 2019

만년필 -3화

소유할 수 없는 욕망

만년필은 아버지 구성준이 떠나고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그에게 왔다. 아버지가 전화로 선물을 보냈다고 하지 않았으면 잘 못 배달 온 것으로 알고 뜯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만년필은 사이즈가 맞지 않은 상자에 담겨 있었는데 싸구려 종이상자 속에 담긴 만년필은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었다. 부드럽고 매끈하게 다듬어진 만년필 그립은 반짝일 정도로 매끈했는데 이것이 원래 이렇게 만들어진 것인지 오랜 손자국으로 길들여진 건이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메탈로 된 만년필 뚜껑에 s.j.라고 새겨진 글자를 보았다. 메탈 뚜껑에는 뱀을 닮은 용 혹은 용을 닮은 현란한 문양이 잘 조물 되어 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끝 쪽으로 잘고 가는 스크래치가 질서 없이 뉘어 있었다. s.j는 상진의 머리글자이기도 하지만 아버지 성준의 머리글자이기도 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물건이었고 지금은 상진의 것이 되었다. 북한에서 영문 이니셜을 새겨주는 만년필 가게를 찾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아마도 러시아 유학 때 선물 받은 것이거나 구매한 것일 듯했다. 상진에게 이 만년필이 그가 태어나서 쥐어본 가장 값진 물건이었으며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일한 선물이었다. 그는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잉크가 들어있지 않은 만년필을 들고 다녔다. 그러다 문득 이 만년필은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가 다니는 편의점 점장에게 물어 만년필용 잉크를 구매하고 컨버터에 잉크를 집어넣는 방법을 배웠다.


잉크가 나오는 만년필을 처음 갖게 된 날 상진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것을 사용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일기를 썼는데 매일 건조하고 반복되는 일상에 쓸 만한 일기 거리가 없어서 그만두었다. 그다음 날은 그가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를 적어 내려갔다. 15개의 번호 중 그가 살았던 하숙집들의 주인들 번호가 6개였다. 의미 없는 숫자였다. 아직 잉크 한 병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였으며 날렵한 펜촉은 언제라도 달릴 준비가 되어 있는 날렵한 포르셰처럼 대기하고 있었다. 문득 그는 만홧가게에서 빌려온 만화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마구잡이로 책을 펼쳐 보이는 곳에 있는 그림을 따라 그렸다. 한 면에 있는 만화를 전부 그리고 나니 2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그는 깨달았다. 아버지가 주신 게 한 가지 더 있었음을. 그의 손이었다. 크고 긴 손가락, 그리고 강한 손목과 예민한 촉감. 두 시간 동안 꼼짝없이 그림을 그렸으나 그의 손은 만년필과 찰떡궁합처럼 잘 맞아 이제 워밍업을 한 것처럼 가벼웠다. 아마도 아버지가 그에게 피아노를 보내셨다면 상진은 자기가 피아노를 매우 잘 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상진에게는 이제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그는 매일 그림을 그렸다.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만년필을 굴렸다. 일주일에 잉크를 한 병씩 썼다. 그가 잘 씻지 않는 그의 손은 항상 잉크로 얼룩이 있었다. 그림을 그린 노트는 한 달에 한 권씩 쌓였다. 5년이 된 지금은 그가 이사할 때마다 62권의 노트를 실어 날라야 했다.


그가 진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탄 것은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들은 그날 저녁이었다. 집에 들러 속옷 한 벌과 양말 한 켤레, 교통카드 겸 체크카드 한 장 그리고 만년필을 챙겼다. 진주병원 장례식장은 한산했는데 테이블 하나에서 건설노동자로 보이는 사람 4명이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를 맞이한 건설노동자 중 한 명은 더 이상 문상객은 없을 것 같으니 같이 한잔 하자고 하여 그는 그렇게 하였다.


장례비용은 건설사에서 대주었다. 안전설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낙마에 대비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상진은 장례비용을 대준 건설사 측 사람에게 연신 감사인사를 해댔다. 위로금을 준비해온 건설사 측 사람은 봉투를 양복 주머니에서 꺼내지도 않은 채 상진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이 정도 관용은 별거 아니라는 듯 으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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