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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현정 Mar 19. 2019

만년필 -2화

소유할 수 없는 욕망

그의 아버지 구성준은 월남한 북한 사람이었다. 공산당 간부였던 할아버지는 유달리 손이 크고 긴 손가락을 가진 아들에게 피아노를 시켰다. 5살 때부터 시작한 피아노는 그의 크고 화려한 장난감이었다. 혁명운동에 대한 피아노곡들은 그의 손가락을 더 단단하고 강하게 단련시켰다. 그 곡들은 그 어떤 클래식 연주곡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속도감과 힘을 요구했기 때문에 구성준이 러시아 유학을 갔을 때 그는 북한의 천재 피아니스트로 불렸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를 위해 로맨틱한 피아노곡을 쳐줘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을 연습했다. 불행은 이 곡에서 시작했다. 그의 피아노 소리를 들은 동료가 그를 당국에 고발한다. 이 곡은 북한에서 허가되지 않은 곡이었다. 조사국에 불려 가 반나절 동안 심문을 받은 그는 그날 밤 국경을 넘는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았던 그에게 반나절의 심문은 참을 수 없는 공포였고 비극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중국과 몽골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구성준은 한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의 뛰어난 피아노 솜씨는 다른 월남한 북한인들과는 다르게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서울 외곽에 있는 피아노 학원에서 선생을 하면서(처음에는 꺼렸던 피아노 학원 원장들은 그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면 하나같이 채용을 서둘렀다) 자리를 잡아갔다.

 그의 피아노 실력이 입소문이 나면서 서울 외곽에 있는 대학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고 피아노 전공 입시생들의 개인교습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는 그의 재주를 통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 다른 월남인들에 비해 훨씬 더 좋은 기회들이 찾아왔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남북의 평화무드가 조성되었을 시 그의 몸값은 더욱 올라 평화를 연주하는 북한 피아니스트로서 그에게 명예까지 수반되었다. 그는 어느덧 유명인사의 반열에 올라 재력가의 딸과 결혼까지 했다. 그는 가끔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연습하던 날을 떠올렸다. 적막 속에 은근하게 울리던 사랑의 세레나데의 주인공 그녀는 사랑이었다가 원망이었다가 그리고 지금은 그저 추억이 되었다. 한 번의 피아노 연주가 그의 삶의 터전, 아내, 인생을 바꾸었으나 그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기회의 땅에서 자유의지만으로 이 높은 곳에 올랐으니 대한민국에서의 삶은 그가 북한에서 몰래 보던 한국 드라마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결혼과 동시에 아이가 생겼던 그는 갖고 있는 목돈을 조금만 불려서 넓은 평수 아파트를 사자고 아내를 설득하고 당분간 전세를 살기로 했다. 연 이자율 20%는 보장한다고 하며 자신의 자금 200억이 들어있는 통장을 보여주던 어느 투자자에게 그는 그가 모은 전 재산을 맡겼다. 20%의 확실한 수익률을 따져 꼼꼼히 계산하여 전세금까지 담보로 탈탈 털어 주었다. 투자자는 그 후로 자취를 감춘다. 투자하기로 했던 건설업체가 비리에 연루되어 줄도산이 났다는 후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에게 통풍과 편두통이 찾아온다. 통풍은 손가락에 엄청난 통증을 유발했다. 편두통으로 밤에 잠을 잘 수 없는 날이 늘어났다. 그러자 통풍은 더욱 악화되었다. 통풍과 편두통이 시너지를 내며 몸집을 키워가는 동안 개인 피아노 교습이 줄줄이 끊기고 급기야 연이은 휴직으로 대학에서도 최후통첩을 통보받는다.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그를 떠났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녀가 재혼을 한다면서 중학생이 된 아들을 그에게 보냈다. 마치 소포를 보내듯 작은 가방 꾸러미 하나 들려서 그에게 보냈다.

상진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 해 구성준은 진주로 내려간다. 알코올 섭취로 인행 통풍은 몇 년째 지속되어 있었고 상진이 졸업할 무렵 유일하게 개인교습을 유지하고 있던 학생도 그를 떠났다. 그는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 못했다. 피아노가 없는 그의 삶은 빠른 속도로 피폐해져 갔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들을 돌볼 여력도 활력도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구성준은 매일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쳤던 그 날을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금지곡 연주로 심문을 받고 그것으로 끝날 수 도 있는 문제였다. 그에게는 아버지의 든든한 백도 있었고 금지곡 연주가 그렇게 심각한 사상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에 가벼운 처벌로 끝났을 확률이 높았다. 그가 그냥 북한에 피아니스트로서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며 매일 밤 후회를 안주삼아 술을 마셨다.


그렇게 갑자기 홀로서기를 하게 된 구상진은 그 후로 편의점 알바를 전전하며 살아갔다. 월세에 쫓기다 보니 대학에 진학할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다. 친구도 취미도 없는 그에게 살아가며 즐거운 일은 딱히 없었다. 인터넷도 티브이도 없는 그는 퇴근 후 주로 만화가게에 들러 컵라면으로 출출함을 달래고 만화를 보았다. 그나마 집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어서 상진에게 저녁을 해결해야 할 때 적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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