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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현정 Mar 18. 2019

만년필 -1화

소유할 수 없는 욕망

상진이 일하고 있는 편의점 세븐일레븐의 점장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구상진 씨인가요?”


“구상진이요? 아닙니다. 전화 잘 못... 아. 상진? 잠시 만요. 저희 가게 아르바이트생 이름인 거 같은데...”


“어이. 상진 씨.”

상진은 한 번도 그의 이름이 불려진 적이 없는 것처럼 눈만 끔뻑이며 점장 쪽을 쳐다봤다.


“상진 씨, 아 뭐 하고 있어. 전화받아 봐요. 에이씨, 이거 뭐 내가 메신전가. 아 웬만하면 핸드폰 하나 사요.”


“아... 죄송합니다.”


옆으로 긴 눈에 외까풀 눈을 가진 그는 초점 없는 눈동자에서 애써 빛을 뿜으려는 듯 눈에 한번 힘을 주며 점장에게 다가왔다. 180센티가 넘는 키에 큰 손과 발, 긴 얼굴이었지만 옆짱구인 그는 언제나 옆머리가 옆으로 삐쳐있었다. 성큼 다가와 전화기를 건네받은 그는 잠시 후 옆으로 긴 눈꼬리를 더 아래로 늘어트렸다. 


“아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제가.. 제가 내일 그리로 가겠습니다.”


점장은 내일 그리로 가겠다는 전화 내용을 듣고 턱을 치켜세우며 상진의 변명을 기다렸다.


“점장님, 저 며칠 휴가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네요. 지방이라 좀 멀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요? 아 이 거참. 상진 씨가 휴가가 어디 있어요. 알바생인데. 얼른 가보세요. 너무 늦을 것 같으면 알바 다시 구해야 되니 전화 꼭 좀 줘요. 힘내고.”


“네... 감사합니다.”


상진은 양 손에 낀 목장갑을 벗어 조용히 계산대 위에 올려놨다. 목장갑을 제외하고 그가 일터에서 가져가야 할 그의 물건은 없었다. 그냥 뒤돌아서서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의 주머니에 교통카드 한 장, 그리고 다른 쪽 주머니에 있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이 그의 소지품 전부였다. 그는 주머니를 더듬거려 만년필이 잘 있는지 확인한 후 편의점을 나섰다. 

오크나무로 세련되게 다듬어진 펜대 한쪽에 그의 이름 이니셜 sj가 소문자로 새겨져 있었고, 은색 메탈의 만년필 뚜껑은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주인이 아니면 뚜껑을 잘 열게 두지 않겠다고 말하듯 펜대를 야무지게 꽉 조이고 있었다. 상진에게 이 만년필은 그와 가장 잘 안 어울리지만 그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다. 미녀와 야수 커플처럼 어울리지 않은 이 둘의 조합은 이상하리만큼 어색했다. 매끈하게 잘 빠진 만년필은 상진의 너덜너덜한 베이지색 면바지 주머니 속에 대각선으로 누워있었고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만년필의 메탈 뚜껑이 빼꼼 빼꼼 나오며 언제든지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집을 찾아 떠나려는 것 같았다. 상진은 그런 만년필을 수시로 안으로 밀어 넣으며 주머니에 가만히 있을 것을 당부했다. 


상진은 만년필에 신경 쓰며 편의점에서 50미터 걸어 나왔을 무렵 그제야 전화기 건너편 음성의 내용을 복기했다.


‘구상진 씨인가요? 아 여기 진주 복합단지 공사장인데 구씨가 어제 건물 4층에서 떨어졌어요. 머리를 크게 다쳐서 병원으로 호송하는 중에 그만 저세상 가버렸네. 여보세요? 구씨 아들 맞죠? 아들이 있는 건 알았는데 전화가 없다고 해서 수첩에서 간신이 이 번호 찾아서 전화하는  거예요. 아들 못 찾는 줄 알고 장례식장은 진주병원으로 해놨어요. 얼른 좀 와봐야 할 것 같은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드디어 그와의 길고 긴 35년의 인연이 끊어졌다. 이번엔 확실히 끊어졌다. 지난 1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아버지는 그에게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딱 한번 신촌에서 하숙하던 시절 하숙집 주인을 통해 전화가 왔었다. 상진은 전화기가 없었지만 연락처가 바뀔 때마다 아버지에게 그에게 연결이 가능한 번호를 남겨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음성이 되었다. 아버지는 ‘너에게 선물을 하나 보냈다. 미안하다.’ 딱 두 마디를 남기고 긴 한숨을 쉰 후 통화를 끝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하고 일방적으로 끊었다. 그가 이사를 할 때 마다 계속 아버지에게 번호를 남겼던 이유는 아버지의 그 한숨 속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였다. 한숨 속에 묻어버린 아버지의 건강과 경제적 형편, 누구와 함께 사는지 그런 소소한 것들을 듣고 싶었다. 끝내 묻지도 듣지도 못한 채 그 한숨소리는 아버지의 마지막 음성이 되었다. 한숨 속 숨겨진 말들은 상진이 상상해야 할 몫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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