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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현정 Sep 10. 2019

어떤 이야기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 그리고 영화 <컨택트>

영화 <컨택트>의 원작 소설인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는 SF 장르를 빌려 쓴 철학책처럼 읽혔다. 영화에서는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뒤쪽 스토리라인에 일촉즉발의 전쟁 상황을 넣었다. 소설에서는 언어학자 루이즈가 햅타포드의 말과 글을 알아가는 과정과 언어가 사고의 체계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좀 더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두 작품 모두 햅타포드라 불리는 진화 생물의 세계가 인간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여준다.


처음과 끝이 없다

햅타포드의 언어에서는 글과 말 모두 처음과 끝이 없다. 영화에서 구현해낸 햅타포드B를 보면 책에서 묘사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비교적 명확하게 이해가 되는데 원작자 테드 창이 상상했던 이미지 그대로 표현해낸 듯하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에는 시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시간이라는 개념이 언어에서 빠져있는 것이다. 

‘인과적’ 사고를 하고 이것을 언어체계에 반영시킨 인간의 언어는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불가항력적인 사실을 기본 전제로 할 수밖에 없는 데 반해 햅타포드의 언어는 ‘목적론적’이다. 이것을 <페르마의 원리>라는 물리학 법칙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빛은 어떠한 목적지를 향해 최단 혹은 최장시간이 걸리는 루트를 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목적지가 설정되는 순간 빛은 가능한 루트 별로 시간을 계산하고 분석하여 최단시간의 루트를 선택한다. 빛의 속도를 감안한다면 목표 설정과 거의 동시에 선택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들의 언어를 공부할수록 루이즈는 그들의 사고 체계를 배워간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차 순서의 개념이 사라지고 그녀는 어느 순간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체험하게 된다. 


소설과 영화의 플롯은 햅타포드의 언어를 닮고 있다. 미래에 갖게 될 딸아이에게 루이즈가 딸의 성장과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들 그리고 딸의 죽음에 대해 예언하는 나레티브가 현재 진행형인 햅타포드 언어 연구와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즉 현재를 살며 미래를 보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이쯤 해서 의문이 든다. 루이즈는 그녀의 미래를 보았기 때문에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 방향으로 현실에서의 선택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한 생각이다. 작가는 햅타포드의 미래를 보는 능력을 <세월의 책>에 비유하고 있다. 미래를 닮고 있는 이 책은 절대적으로 옳아야 하는 것으로 누군가 이 책을 보고 미래를 바꾸기 위해 선택을 바꾼다면 이 책은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는 미래를 경험하고 이 경험이 일종의 절박함을, 자기 자신이 하게 될 행동을 정확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p.210)는 설정을 담고 있다. 


결과적으로 햅타포드의 세계에선 미래의 어떤 결과가 지금 내가 한 ‘선택’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처음과 끝이 없이 그냥 그렇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관찰할 뿐이다. 


목적이 중요하다

햅타포드 언어의 중요한 체계인 <페르마의 원리>에 따르면 목적이 무엇인지 매우 중요해 보인다. 목적 설정과 동시에 과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미래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든 혹은 이루어지는 어떤 행위든 햅타포드의 언어와 그들의 사고체계는 이것이 중심이 되지 않을까 싶다. 루이즈가 경험한 미래에선 그녀의 딸이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으로 다루어진다. 그래서 그녀가 보는 대부분의 미래 속에는 딸과 함께 보냈던 시간이 존재하고 딸을 중심으로 루이즈의 ‘미래 기억’이 편집된다. 


햅타포드의 세상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란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미 정해진 미래에 따라 그것을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종교 속 인간의 모습과 닮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그것이 비록 영원하지 않을 걸 알지만 그와 함께하는 매 순간순간을 살아보기 위해 살아가는 삶이란.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최장시간을 살기 위해 최적화된 방법은 그 순간을 최대한 즐기고 최대한 그와 많은 감정을 나누는 것이 해법이 될 것이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가져야만 하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루이즈가 딸에게 하는 이야기였으나 이는 햅타포드가 인류 모두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영화 <컨택트>에서 햅타포드와 햅타포드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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