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수다 / 고산초 지수연
시치미 뚝 떼고 우리 학교는 좋은 학교, 우리 경기혁신교육의 앞날은 무지개 뜬 화창한 아름다운 내일일 거라며 희망찬가를 부르며 시작하면 좋을까도 싶었지만 그렇게는 못하겠다. 우리 학교가 성에 차지 않고 시시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혁신학교가 교사의 기를 빨아먹는다는 뜬소문 때문도 아니다. 공식 지면에 올리기엔 사소한 일이겠으나 앎이 삶이고 배움이어야 할 그런 총체적 교사의 생애주기를 생각해주시길.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부모님들은 딸과 며느리가 학교, 학교 하면서 허둥대는 사이에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계셨던 터라 병원 심부름과 안부 챙기기로 밀린 숙제와 빚이 산더미이고, 젖병과 기저귀 떼기만을 고대했던 아들들은 훌쩍 커버린 키와 달리 대한민국의 교육문제를 온몸으로 보여주면서 더디게 자라 애를 태우고, 쉬엄쉬엄 살라면서 한 방에 훅 갈 수 있다 겁주던 이들의 예언이 실현될 듯 말 듯, 내 몸은 구석구석 삐걱대면서 불안하게 늙고 있다. 그래서 내 수다는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큰일은 없고?’로 시작하는 푸념이고, 일반적인 중년의 대화와 다르지 않다. 타고나길 좀 투덜이였던 것 같지만 개인사를 들먹이며 엄살을 떨 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진심이면 통할 거라 믿었으나 너와 나의 다름을 뼈아프게 느낄 뿐이었어.’, ‘민원 앞에서는 을일 수밖에 없는 가련한 공무원이구나.’, ‘미스 김이자 김사부이고 싶었지만 넌 그저 시끄러운 것도 싫고 시간에게 모든 걸 미루는 겁 많고 생각 많았던 지선생일 뿐이야.’
지난해 10월, 오래 시달리던 일은 민원이 되었고, 그것은 고양이 톰의 바벨 위에 앉은 파리 한 마리처럼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을 나를 폭삭 주저앉게 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교실로 간다. 아침 하늘을 보겠다면서 고개를 젖히고, 가슴도 쭈욱 펴고 치마가 찢어져라 성큼성큼 힘차게 걷는다. 교실로 가는 길, 나는 이 길을 정말 좋아한다. 학교 뒷산 큰 나무에 깃든 작은 새들이 부지런히 날아다니며 내는 소리를 빼고는 고요한 운동장, 뭐라 묘사할 길이 없는 그런 기분으로 4차원 관문으로 들어가듯 그렇게 설레며 나는 학교에 온다. 우리 학교는 전교생이 87명인 6학급 작은 학교, 의정부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오는 사람마다 여기가 의정부 맞느냐고 되묻는 그런 학교이다.
여기 와서 살겠다고 결심한 때, 내겐 그럴듯한 명분 내지는 꿍꿍이가 있었다. 삼 년 동안 있었던 솔뫼 초등학교에서 굳이 학교를 옮길 이유는 없었다. 그 어느 학교에서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동료들과 함께 만드는 교육과정으로 활력이 넘쳤고, 고단하기는 했지만 수업을 나누는 재미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꿈꾸던 게 하나씩 현실이 되던 혁신학교에서조차 과연 일 년짜리 담임으로 맺는 관계로 아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내가 꾸고 있는 꿈이 작아서 그러는 건 아닐까 싶었다. 미래학교라 불린다는 유럽의 잘 나가는 학교에서 하고 있다는 5년 담임, 8년 담임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담임이 되어 4년만 지켜보면 난 엄청난 비급을 손에 쥘지도 몰라. 그리고 결심했다. 작은 학교로 가리라. 적은 아이들을 4년 동안 가르치리라. 증거를 찾아 대안을 내놓으리라.
그렇게 오게 된 우리 학교, 하지만 6학급 학교에서 혁신학교 교사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함께 하는 선생님들은 정말이지 다른 학교였다면 꽃 학년이라 불릴만한 울트라급 구성이었지만 제대로 된 동학년 공동체를 경험해 봤기에 혼자서 학년을 감당하는 게 무척이나 고단했다. 얼기설기 교육과정을 짜고 주섬주섬 작은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면 혼잣말을 하기 일쑤였다. 함께 모여 아이들 이야기를 하고 각 학년에서 하고 있는 것들을 나누고, 협력하는 문화가 잘 자리 잡힌 곳이었지만 그 밀도와 깊이를 지난 학교에서의 동학년 교과연구에 견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과의 만남은 좀 달랐다. 한 아이를 오롯이 바라볼 수 있었고, 열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만드는 수업은 다른 재미와 깨달음이 있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속도로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자란다는 것도 알았고, 오래 바라보고 추어준다 해서 아이가 빨리 자라는 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정말 잎이 나고 꽃이 피는 시기가 저마다 따로 있는 것 같았다. 관심과 사랑을 경쟁하지 않아도 되도록 살필 수 있었고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대접하면서 비교적 평화롭게 살았다. 두 번째 3월을 맞은 작년에는 아이들이 또 담임이 된 나를 보면서 안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해마다 학교에서 새 교실, 새 담임, 새 친구들을 만나 적응하느라 고생을 하고 있을까 새삼 안쓰러웠다.
그렇게 2년 담임에 연착륙하면서 3년 담임을 도모할 늦가을 즈음, 해결할 수 없는 한 학부모의 꾸준한 요구가 드디어 민원으로 폭발했다. 그동안 정말 애를 썼던 일로 인한 거라서 개인적인 공격으로 돌아온 민원에 나는 지쳤고 실망했고 화가 났다. 정면으로 대응하기엔 누군가 시달릴까 걱정스러웠고, 외면하고 침묵하자니 모욕적이었다. 무기력감과 허무한 심정으로 겨울을 났다. 다만 정말이지 외롭지는 않았다. 믿을 수 있는가. 난 학교에서 절대로 외롭지 않았다. 나의 동료들은 내가 만든 일이라며 속으로 탓하거나 나만의 문제로 두지 않았고, 함께 고민해주었고 위로해주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일이 2년 담임의 부작용은 아닐까 싶었다. 교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학교의 공공성을 지켜낼 원칙과 경계가 작동하지 않아서 이런 일을 겪을 바에야 반년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반년은 내년을 기약하며 참아내는 그런 한해살이 담임제가 차라리 낫겠다 싶었다. 폭탄을 안고 아이들과 행복하게 지낼 자신이 없어져갔다. 그리고 결국 포기했다. 올해 새 아이들을 만났다.
새로 오신 교장선생님은 3월 첫 주를 그 학부모에게 시달렸지만 지치지 않고 원칙을 고수했다.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은 전면에 나서 주어 새 담임교사에게 못내 미안했던 내 처지가 그나마 덜 궁색해졌고, 이 년 내내 내세웠던 원칙이 관리자의 손에서 흔들리지 않고 작동하니 마음이 놓였다. 그럭저럭 슬럼프는 벗어난 것인지 자책감으로 우울했던 게 사그라졌지만 낯선 교장선생님이 일관되고 강하게 대응하자 오히려 잦아드는 그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학교공동체라는 거 어쩌면 성숙한 시민이 만나 서로 노력해야 만들어지는 것일 듯한데, 그게 과연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가능할까.
도무지 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일들이 현실의 학교에서 작동하는 것을 지난 5년 동안 눈으로 보았다. 또 이전에는 내가 게을러 발견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관료사회의 한계를 넘으려 애쓰는 교육청의 선의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정책의 한계와 극복 방안, 지나온 길과 나아갈 길을 함께 살펴보는 문서들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아직은 주저앉으면 안 된다. 어떤 신기한 일이 펼쳐질지 모르니까. 6년 담임이 가능할 수도 있고, 6학급 교사들의 고충을 지원하는 시스템, 악성 민원을 해결하는 법적 자문도 강화될 수도 있다.
며칠 사이 벌써 살만해진 건지 뭐 다른 대안은 없나 두리번거린다. 6 학급에서는 저학년, 고학년으로 교사들이 팀을 이루어 몇 개의 교과를 나눠 맡으면 어떨까, 그러려면 정말 업무 부담이 없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없애야 할까, 6 학급에서 창의적인 교육과정은 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막 터널을 빠져나온 이로서 편안히 이야기하기는 어려웠다. 삼킨 말이 많아서 꺼내기도 부담스럽고, 시시콜콜 다 꺼낼 수도 없으니 이 지면은 갑갑하다. 나만 발견했던 아이들의 진짜 모습과 믿을 수 없이 반짝이던 순간, 깨달음이 후회와 반성, 또는 경탄으로 이어지는 장면들, 이걸 우리가 해냈다는 걸 말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만큼 자랑스러웠던 동료들과의 역사, 다음에는 뭐 이런 걸 쓰고 싶다. 어쨌든 이렇게 주절거림으로써 상처에 앉은 딱지가 떨어진 것인지 평온하다. 수다는 힘이 세다.
여러분은 모두 상식적인 하루를 보내시길. 그래서 올 한 해 동안 안녕하시길.
고산초 지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