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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lys Mar 28. 2017

4월, 잠들지 않는 제주를 가다

휴∼ 休 ‘첫 번째 이야기’ / 소명여중 이민영

봄. 제주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 살짝 낯선 느낌이 들었다. 왜일까? 아무래도 주로 여름과 겨울 외에는 여유를 낼 수 없음으로 인한 첫 제주 봄나들이의 설렘 때문일 것이다. 날씨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제주도의 날씨는 우리 아이들처럼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한라산 정상에 두 번이나 올랐음에도 운무 때문에 코앞에 있는 백록담을 보지 못한 허망함과, 터벅터벅 내려오는 하산 길에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을 보며 느낀 배신감의 기억은 제주 날씨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마음의 여유를 주었다.
  제주는 날씨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을 품고 있다. 처음 제주를 찾았을 때는 알려진 관광지 위주로 여행을 하게 된다. 아이가 어릴 때는 셀 수도 없는 온갖 다양한 박물관과 전시관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올레길이 유명해지고 쉼과 휴식이 유행처럼 삶을 파고든 탓일까. 최근 제주여행의 목적지는 주로 자연이다. 숲길을 걷고, 오름을 오르고, 해변 가 작은 길을 찾아다니고, 곶자왈 같은 특별한 지형을 탐방하며 제주의 속살을 본다. 부끄럽지 않은 듯 몇 번을 가도 계절마다, 날씨에 따라, 혹은 함께 하는 사람마다 다르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제주는 최고의 여행지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또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기대가 된다.

  서우봉. 제주공항에서 동쪽으로 40분쯤 차를 달리면 도착하는 함덕 해수욕장과 맞닿아 있는 곳이다. 물에서 기어 나오는 소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서우봉(犀牛峰)은 제주 올레길 19코스의 일부 구간이며, 산방산, 섭지코지 등과 함께 아름다운 유채꽃을 볼 수 있기로 알려진 곳이다. 그리 높지도 길지도 않은 서우봉 산책로를 천천히 걷다 보면 푸른 바다와 노란 유채꽃의 환상적인 어울림이 펼쳐진다. 제주 서쪽 수월봉에서 바라보는 차귀도 앞바다와 남쪽 서귀포, 중문 앞바다의 푸른빛도 예쁘지만, 역시 제주의 바다는 협재와 함덕의 에메랄드 빛 북쪽 바다가 최고의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바다와 함께 춤추고 있는 서우봉의 유채꽃은 일부러 가꾸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가장 큰 장점이다. 아름다움에 취해 얼마나 걸었을까. 작은 봉우리를 한 바퀴 돌아 큰 길로 나오면 화산활동으로 생긴 ‘널찍한 돌밭’이라는 의미의 너븐숭이 지역이 나오고 그곳에는 지금까지 본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아픈 사연을 담고 있는 작은 전시관이 있다. 여행은 지금부터다.

함덕 해변과 서우봉 유채꽃

  

백비(白碑). 1945년 이후 수년간 해방정국의 치열함이 계속되던 시기에 미군정에 의해 ‘붉은 섬'(Red Island)로 낙인찍힌 제주는 1947년부터 1954년까지 피로 물들게 된다. 너븐숭이 4·3 기념관은 이 시기 마을 주민 400여 명이 한 날에 희생된 제노사이드(집단 학살)가 일어난 곳에 세워져 있다. 철저하게 가려져 있던 아픈 역사를 땅속에서 끄집어낸 1978년 작 현기영의 ‘순이 삼촌’의 배경이 된 이 사건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관에는 특히 희생이 많았던 아이들의 무덤이 모여 있어 보는 이들을 더 숙연하게 만든다. 언제 찾아가도 우리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제주에는 사실 이렇게 아픈 기억으로 가득하다. 너븐숭이 말고도 제주도내 4·3 유적지는 수백 곳에 이르며 그중 가볼 만한 장소로는 ‘제주 4·3 평화공원’이 있다. 1948년 감행되었던 ‘중산간 초토화 작전’의 현장 중 한 곳인 봉개동 넓은 터에 자리 잡은 평화공원에는 추모광장, 위령제단 등이 있고 4·3 사건의 전말을 살펴볼 수 있는 기념관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돌아보기에 적합하다. 20분 정도의 영상을 시청한 후 전시관의 첫머리에 들어서면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못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비문 없는 백비가 우리를 맞이한다.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 백비가 있는 1관을 시작으로 7개관으로 이루어진 전시관은 시간에 맞춰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둘러볼 수도 있으나, 비교적 설명이 상세하게 되어 있고 천천히 그 의미를 되새기며 관람할 수 있도록 배치가 잘 되어 있어 아이의 손을 잡고 걸으며 함께 눈을 맞추어 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듯하다. 먹먹한 마음으로 기념관을 다 보고 나면 과연 백비에 언제쯤 진실이 쓰여질 수 있을까 무거워지지만, 함께 한 아이들의 마음속에도 분명히 새겨질 그 무언가가 작은 위안을 준다.

< 4·3 평화공원 기념관에 있는 백비(白碑) >푯말의 글;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잠들지 않는 남도.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기념관을 나서며 대학 시절 의미도 잘 모르면서 폼 잡고 불렀던 노래가 생각났다. 그리고는 지난 제주 여행 때 들렀던 장소들도 떠올랐다. 서남부 송악산 근처 알뜨르(아래 벌판)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 사용했던 군사 비행장 터가 남아 있다. 인근 송악산 해안 진지를 비롯해 제주에는 수많은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고 태평양전쟁의 절정기에는 무려 6만 명의 일본군이 제주에 주둔해 있었다. 허허벌판에 을씨년스럽게 자리 잡은 흉물스러운 20여기의 콘크리트 격납고는 애써 간과하고 있던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부는 바람에 가슴이 더 에인다. 바로 근처에는 또 하나의 4·3 유적지인 섯알오름 학살터가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외진 곳에서 억울한 죽음의 진혼곡을 들려주고 있다. 어쩌면 이것의 제주의 진짜 속살인지 모른다. 감추고 싶은, 감추어져 왔던 제주의 역사는 아름다운 풍광과 관광객의 홍수 속에 오늘도 잠들어 있다. 아이들과 함께 테마파크의 예쁜 기차를 타고 곶자왈을 구경한 후 잠시 근처에 있는 4·3 평화공원을 들러보자. 서우봉 유채꽃과 함께 너븐숭이 기념관도 살펴보고, 용머리해안과 송악산을 둘러볼 때 알뜨르 비행장도 찾아보자. 그랬을 때 제주는 영원히 잠들지 않는 섬이 될 것이다.

에필로그.



다시 함덕 해수욕장 쪽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본다. 조용하던 해변은 몇 해 전부터 생겨난 횟집과 카페들로 제법 북적인다. 커다란 통유리를 통해 바다를 볼 수 있는 카페에 들어가니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나조차 향긋한 커피 냄새와 갓 만들어낸 빵들이 내미는 유혹의 손짓을 거절하기 어렵다. 창가에 자리를 잡으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한 나트륨 등 사이로 좀 전에 다녀온 서우봉이 멀리 보인다. 노란 물감을 흩뿌려 놓은 듯한 유채꽃밭, 그 앞에 펼쳐진 에메랄드 색깔의 바다, 그리고 언덕 너머, 먼 시간을 넘어야 볼 수 있는 핏빛 기억들. 그래서 4월의 제주는 칼에 베인 것처럼 쓰라리게 아름답다.
                             

소명여중 이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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