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담론 / 송순재_삶을 위한 교사대학 이사장
* 이 글은 졸저『상상력으로 교육에 말걸기』중 제1장을 간추린 것으로 우리 교육에서 그간 거의 다루어지지 못했던 “교육공간” 에 대한 관심의 전향을 위한 것이다.
1. 교육 공간이란 무엇인가?
학교 공간에 대해 한 번 같이 생각해 보고 싶었다. ‘공간’이란 ‘환경’이나 ‘시설’ 같은 용어와는 좀 다른 말이다. 교육 환경이 공간을 포함하여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교육적 조건 전체를 뜻하며, 교육시설이 학교 건물이나 교실 같은 교육적 의미에서의 물리적 실체를 국한하여 지칭하는 것이라면, 교육 공간은 아이가 생을 영위하는 동시에 학습 활동을 하도록 교육학적으로 조성되었거나 조성되는 다양한 물리적 조건을 말한다. 집이나 학교 교실도 공간이지만 시장, 박물관, 시청, 연주회장 전람회장도 공간이며, 숲이나 강, 바다, 하늘 같은 자연도 공간이다. 한편 교육공간은 아이 외부에서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아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도 있는 실체라는 특징을 갖는다. 랑에벨트(Martinus J. Langeveld)는 아이들만의 ‘비밀스런 장소’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이를테면 아이들은 종종 책상 밑으로 들어가거나 커튼 뒤로 들어가서 노는 식으로 자기 나름대로 공간을 만들어내곤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인간이 공간을 ‘체험’하며 이를 통해 공간을 다시금 자기편에서 재구성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 기하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특정한 계기를 통해서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다시 말해서 삶의 체취가 묻어있는 공간을 일컫는다. 아이가 쓰는 방에 들어가서 보면 단순한 넓이와 높이 이상의 정신적 질이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특정한 공간 체험은 나의 내면세계를 의미 있게 형성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교사라면 우리는 이 체험이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교육학적으로 쓸모 있게 되도록 애쓸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공간의 교육 인간학적 문제’라 하겠다. 어떻게 하면 특정한 공간 형태가 인간의 내면을 유의미하게 자극하고 불러일으키는지, 어떤 형태와 색채와, 어떤 분위기와 어떤 사물과 가구 배치가 그렇게 하거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 묻는 것이다. 또 사람들마다 나름대로 반응하는데 그 개개 이미지는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여러 공간에서, 즉 집에서, 거리에서, 학교와 자연에서 모두 찬찬히 새겨보아야 한다. 일을 위한 공간 구조가 있다면, 놀이와 산책을 위한 공간 구조는 분명 이와는 달라야 한다. 자, 이쯤해서 이야기의 초점을 학교 공간 조성이라는 문제로 모아 보자.
2. 학교 건축공간의 교육학적 조성을 위한 열 가지 제안
우리나라에서 학교 공간 문제는 지금까지 의미 있게 다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던 중 최근 몇 년 사이 현장에서 꽤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동안 거의 전적으로 의례적 영역, 즉 교육정책이나 교육과정, 학습방법론 등에 국한되어 있었던 관심의 방향을 생각해 보면 분명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이러한 논의와 실천이 좀 더 활발하고 유실해질 수 있도록 나름 교육 공간조성에서 유의할 점들을 열 가지 정도로 추려서 제시해 본다.
1) 철학이 녹아있는가?
학교 공간을 건축하는데 기본적으로 철학적 관점이 바탕으로 깔려있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건물은 대충 이렇고, 중고등학교 건물은 대충 이렇고, 대학교 건물은 대충 이렇고 등등. 나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숱한 우리 학교 건축물에서 그 밖에 특별한 다른 인상을 갖기가 힘들었다. 대충 획일적으로 이러저러하게 만들어진 학교 건축물이나 공간양식이 그 학교의 철학을 나타내고 있다고 믿기에는 어렵다.
2) 몸과 마음에서 느끼고 누릴 합리성과 안전성
합리성과 안전성이란 다음과 같은 물음, 즉 학교와 교실의 크기는 알맞은가? 공간구조 내에서 다양한 시설물들을 활용하기에 합리적인가? 다양한 수업을 소화해 내기 위해서 공간 구조는 유연한가? 교실의 조명도는 충분히 밝은가? 혹은 따뜻한가? 햇빛과 바람은 잘 통하는가? 또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학생들은 안전한가, 그들은 다양한 학습활동에서 충분히 보호받고 있는가? 등의 물음에 관한 것이다.
3) 아늑함과 트임
아늑함이 정서적 안정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라면, 트임은 외부 세계에 대해 개방적이고 미래를 향해 열린 구조를 확보해 내기 위한 것이다. 이 문제는 학교의 진입로, 교실 안의 분위기, 조명도를 조절하는 문제에서부터 복도와 운동장과 창문의 구조, 자연 안에 학교를 배치하거나 자연을 학교 안으로 끌어들이는 문제, 지역사회와 일정한 연계 구조를 확보해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다.
4) 삶의 분지화와 전체성
분지화란 개별 과학의 분화과정 및 현대산업사회에서 작업의 효율화를 위해 도입한 분류구조로 인해 삶과 교육에 초래된 바, 전체성의 해체 현상을 말하고, 다른 한편 전체성이란 그렇게 해체된 분지들을 다시금 한 자리에 불러 모아 함께 엮어내기 위한 작업을 말한다. 전자가 교과와 전공을 세분화시키고, 다양한 연령층을 위한 교실을 만드는 것 등이라면, 후자는 전일적 교육과정을 모색하고, 개개의 삶을 상호 연결시키거나 공동생활의 유의미성을 복원하는 등, 학교 내 다양하게 분지화된 구조를 전체성 안으로 회복하기 위한 공간 확보에 관한 과제이다.
5) 민주주의적 공간과 통제식-권위주의적 공간
우리네 소위 ‘근대식 학교’가 갖추고 있는 통제식-권위주의적 공간을 극복하고, 수평적 의사소통에 기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는 교장실을 학교의 어느 부분에 배치하느냐 혹은 교장실 내부를 얼마나 수평적이며 의사소통적 구조로 제시해 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교실 안과 강당 내 좌석 배치를 어떻게 하느냐 혹은 본관과 다른 건물들 사이의 위치 배열이나 연계 구조를 어떻게 확보해 낼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 걸쳐서 검토해 볼 수 있다.
6) 아름다움이 경험되는 미적 공간
공간이 함축하는 미적 차원의 문제다. 학교 건축물 외부나 다양한 내부 공간은 아름다워야 한다. 그 까닭은 아름다움이 청소년들의 마음을 잡아 이끌고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며, 이 삶의 차원 없이 참된 의미에서 정신적 삶은 형성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예술적 표현 형태에서 촉발되며 발전한다. 그러기에 학교 건축물에서 예술적 안목을 적극 도입하자는 것이다. 그런 학교에 학생들이 가고 싶고 살고 싶고 즐기고 싶어 할 것은 당연하다.
7) 내적인 공간
학교는 내적인 공간을 필요로 한다. 학교는 다만 지식만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삶의 전체적인 면을 배양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육체적, 감정적 면 뿐 아니라, 이를 넘어서 내적 세계도 중시해야 한다. 내적 세계란 양심의 작용이 일어나고, 형이상학적-종교적인 체험이 발생하는 자리를 일컫는다. 그런 뜻에서 꼭 어떤 종교적 예배실이 아니더라도 가만히 머물러 스스로 침잠할 수 있도록 돕는 그런 공간을 확보해 보자는 것이다.
8) 전통과의 교류
전통 가옥 공간구조가 만들어내는 의미는 매우 크다. 그럼에도 이 전승이 근현대식 건축물에 밀려서 소멸되어가는 상황에 대해 성찰해 보고 이를테면 서원이나 서당 등이 가지는 교육학적 의미를 현대적 상황에서 재구성하여 제시해 보자는 것이다.
9) 생태적 공간
오늘날 생태위기에 관한 문제의식은 학교교육에서도 긴급한 과제가 되었다. 이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 공간의 자리 그 자체부터 변화시키는 노력 없이 기약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생태적 학교건축”이나 “생태적 학교공간조성”이라는 주제를 내걸어 본다. 이 과제는 아마도 근래 대안학교들의 공통적 관심사이기도 하겠지만, 공교육 현장에서 새로 지어지는 학교나 내부시설 재건축을 요하는 부분들에 해당되기도 한다.
10) 함께하는 집짓기 프로젝트
학교 공간을 학생들에게 단순히 완성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이는 학과 수업에서 다룰 수 있는 소소한 문제에서부터 학교 공간 전체와 구석구석을 어떻게 구성해 내느냐 하는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는 다만 학교 활동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개개 학생들이 장래 자기 집을 짓고 도시를 건설하는 주체로 나섰을 때 그들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접근할 것인지를 돕기 위한 준비 작업이기도 하다.
이상 열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제시해 볼 수 있는 국내외의 여러 사례들도 살펴볼 수 있겠다.
3. 상상력이 살아있는 학교 공간
우리들의 학교가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상상력이 아닐까 싶다. 구로야나기 테츠코가 『창가의 토토』에서 어릴 적 자신의 추억을 바탕으로 그려낸 고바야시 소사쿠 선생님(1893-1963)의 “도모에 학원”(초등학교) 교실과 도서관은 폐차된 전동차들을 가져다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교문은 콘크리트가 아니라 살아있는 두 그루의 나무로 되어 있었고, 교정 주변에는 담장 대신 갖가지 나무와 꽃들이 가득 피어있었다. 이 기발한 학교 건물만큼이나 여기저기서 아주 기발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고바야시 선생님의 독특한 철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아이들은 천성적으로 선하며 저마다의 개성에 따라 자유롭고 행복하고 기쁨에 가득 차서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름답고 행복했던 학창시절에 대한 갖가지 추억담을 가득 담은 이 책의 처음을 저자는 바로 그 전동차 교실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학교는 1945년 이차대전 중 폭격으로 불타버려 지금은 그 자취도 없지만 그 학교에 대한 기억은 저자에게 평생토록 끊임없이 창조적 생각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창가의 토토”라는 책을 펴내게까지 하였던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다시금 이렇게 반문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이 천편일률적인 건축물들은
바로 그러한 ‘가치의 학교’ 같은 것을 꿈꿀 수 없었던 빈약한 상상력 때문이 아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