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담론 / 고인룡_ 공주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학교공간에 갇힌 학교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대부분은 (아마도) 적어도 지난 십(수) 년 이상 그랬던 것처럼, 오늘 아침에도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를 외치며 집을 나섰을지 모른다. 자 이제 학교의 모습을 가만히 떠올려 보자. 아마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이 학교환경(건물)에 대한 저마다의 기억과 모습은 대략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심지어 학교 선생님들은 가르침을 받는 곳에서 가르치는 곳으로 역할이 바뀌어 있는 지금의 모습마저도 별로 차이가 없을 수도 있겠다.
만일 우리가 ‘학교’하면 떠오르는 모습이 그토록 비슷하다면 학교라는 ‘교육공간’ 은 학습에 대한 거의 변함없는 우리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우리 정체(identity) 또한 그 모습으로 형성되어 왔다.
교사인 윌리암 에어스는 그의 책 「가르친다는 것」 중에서 교실 만들기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이 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원래 공간은 껍데기이고 죽어 있고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다음은 적극적 선택이다. 어떤 아이디어,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이 공간에 삶을 불어 넣는다. 그래서 각 공간은 그냥 단순한 배경, 바닥과 벽과 천장만이 아닌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가치가 구체화된 곳, 만들어진 생태계가 된다."
모든 인간 환경에는 그 안에 어떤 생각, 믿음이 깃들어 있다. 일부러 그렇게 했든 아니든 간에, 어떤 사람들은 구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특별한 환경을 만든다. 그렇지만 그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떤 공간을 보고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것이다.
"공간은 인간 행동을 담는 그릇이다. 때로는 억압적이고 때로는 해방적이고, 아름다울 수도 있고 추할 수도 있다.”
교육공간에 대해
교육을 의미하는 ‘educate’에 대한 어원을 보면 “밖으로 이끌어 내다”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건축을 하는 필자의 입장에선 이 말은 밖으로 뛰어 나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공간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이 말 그대로 일정한 공간에 갇히지 않는 것이 진정한 ‘배움터’의 조건이다라는 식이다. 교육이라는 기능지향공간인 ‘교실공간과 학교공간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경계 밖으로 나와 외부(사회)와 연결되는 확장되는 배움의 장소’가 또 다른 학교공간의 정의가 될 수 있겠다.
사실 우리 학교 모습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실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일자형 복도와 교실’, ‘교문-운동장-구령대-화단-일자형 학사-뒤뜰’로 이루어진 획일적 모습은 우리 교육의 상황과 교육과정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 학교의 구조는 근대적 개인을 만들고자 했던 또 다른 “판옵티콘(panopticon)” 이었다. 효율과 경쟁을 수단으로 하고 의도된 집중과 침묵을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구조의 학습공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리만큼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학교(건물)에 다니고 있는 게 아닐까?
지금 우리 학교 들은 어찌할 수 없이 주어진 학교공간을 상수로 놓고 거기서 우리의 교육 목표와 내용을 바꾸려고 애쓰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제 교육 혁신을 꿈꾼다면 동시에 교육공간의 혁신을 같이 이루어야 한다.
DIY학교 : 고정된 교실과 가변적인 프로그램
가장 기본적인 교실 환경에 대해 생각해 보자. 교실들은 대개 당연한 듯 복도와 외부에 면해 장방형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장축 쪽으로 한쪽에 칠판과 교탁이 배치되고 이를 마주 보고 학생들의 의자가 배치된다. 대개 건축에서는 이런 장축 방향의 배치를 활용하는 경우 시각적 집중을 만드는 투시도적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초기 그리스도교회당에서 제단과 설교단의 위치가 이러한 효과를 극단적으로 활용한 것처럼 교실의 경우도 교탁과 칠판 그리고 교사가 교실의 초점을 이루도록 배열된 것이다.
너무도 익숙한 이러한 교실의 배치는 학생이 넘쳐나던 ‘콩나물시루 교실’에서는 분명 효과적인 형식이었다. 그러나 일방적인 학습의 전달과 수동적 수용이라는 형식구조를 동전의 뒷면으로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현재 우리의 교육의 목표가 개별화, 자율화 학습이라면 지금까지의 효율적이던 교실이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일부 학교에서 사용하는 사다리꼴 개인 책상으로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도 있다. 다양한 책상의 배열을 통해 교사와 학생의 공간적 거리를 줄이고 다양한 학습형태에 대응하도록 하는 손쉬운 방법이다. 신발을 바꾸면 옷도 바꾸는 법이다.
이제 그 다음으로 배치의 변화와 학생의 수가 줄면서 생긴 공간적인 여백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흔히 발견되는 곳으로 교실 뒷부분을 보자. 과거의 사용형식에 맞추어 뒷벽에 붙여 배열된 사물함은 오히려 뒷부분의 공간의 배경인 벽의 활용을 가로막고 그 위로 설치된 게시판은 접근하기 어려워 학기 초에나 한 번씩 꾸미는 장식벽으로 남는다.
결국 교실 뒷부분을 자투리 공간으로 고정시켜 가변적 공간 활용을 막는 원인이 된다.
이 때 필요한 것이 교실의 공간구조에 대한 ‘생각 바꾸기’이다. 교실 뒤를 자투리라는 생각에서 교실의 독립된 영역으로 보고 뒷벽이 아니라 테마벽으로 생각해 보자. 그러면 그 벽을 중심으로 공간을 구성하게 되고 대신 사물함은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칸막이 등)로 활용할 수도 있겠다.
이와 같이 학교공간은 교사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학교 구성원들이 살펴보면 누구나 쉽게 바꿀 수도 있는 만만한 것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교실은 어떻게 쓰겠냐는 생각과 프로그램이다. 사실 교실을 제일 많이 이용하는 사람들은 학생들과 교사들이며 이 부분에 관한 한 전문가는 바로 교사들이다. 오히려 건축가(디자이너)는 이들의 아이디어 위에 공간을 다루어야 한다.
새로운 학교, 함께 만드는 학교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구조화된 우리의 학교를 낯설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낯설게’ 바라보는 방법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익숙한 학교 환경 속에 숨어 있는 의도를 발견하는 것이고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균열을 확대하여 새로운 의미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 건축의 경우 학교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을 담아내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 가야 한다. 학교 환경을 만드는 중요한 주체로서 교사들도 자신이 포함된 공동체의 환경을 만들어가는 전문가이며 디자이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지 교육적 기능이나 효율적 교육만을 위한 주어진 장소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삶의 장소로서 같이 생활하는 곳의 문제를 해결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한다.
지금, 우리는 학교 전문가인 교사들에게 학교공간을 묻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