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休 ‘세 번째 이야기’ / 이민영_소명여자중 교사
겁에 질린 소년은 아무 말이 없다. 자신을 늘 놀리고 괴롭히는 친구들을 피해 숨어들어간 어두컴컴한 빈 집에서 소년 ‘리틀’은 마약 밀매상 후안을 만난다. 주인공의 삶에 영향을 주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을 만나게 되는 순간이다. 거친 일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후안과 그 아내는 어린 리틀에게 따뜻한 식사와 잠자리 그리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리틀은 여전히 말이 없지만 그 표정과 행동에서 후안이 유일한 안식처임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지옥은 술과 마약에 찌들어 자신을 구박하는 엄마가 있는 집이다.
2017년 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사상 초유의 해프닝으로 머쓱하게 막을 내렸다. 주최 측의 실수로 영화제 최고 영예인 작품상 발표가 ‘라라랜드’에서 ‘문라이트’로 번복된 것이다. 이미 13개 부분 노미네이트에 6개의 트로피를 손에 쥔, 더구나 전작 ‘위플래쉬’에서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색다른 감각으로 호평을 받은 감독의 유쾌한 뮤지컬 영화가 수상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결국 오스카는 무명에 가까운 흑인 감독 배리 젠킨스의 작품에 주어졌다.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이제는 굳이 집 근처 멀티플렉스를 벗어나는 수고로움은 잊은 지 오래고 특별한 기대감도 없었지만 발걸음은 극장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어렵고 지루하기로 유명한 타르코프스키 영화도 훌쩍 10만 관객을 넘기던 90년대 초반과는 다르게 이제는 다분히 대중적인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아도 흥행이 보장되지 않으면 여간해서 개봉관을 잡기 힘든 게 현실이라, 어렵사리 극장을 찾아 도착했을 때의 피곤함으로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살짝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후회는 잠깐, 이내 내 마음속 올해 지금까지의 최고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어린 리틀이 청소년 ‘샤이론’으로 성장한 이후, 안타깝게도 그를 따뜻하게 감싸주던 후안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여전히 학교에서 왕따인 샤이론에게 그나마 친구가 되어준 건 케빈이었다. 바다 위 달빛과 케빈과의 짧은 강렬한 추억. 하지만 계속되는 학교에서의 따돌림과 폭력은 샤이론을 또 다른 폭력의 가해자로 만들었고 샤이론은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소년원에 다녀온 후 시간이 흘러 샤이론은 세번째 닉네임 ‘블랙’으로 돌아온다.
좋은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영화가 예술인가, 산업인가의 논쟁처럼 모호하다. 사람마다, 그들의 다른 기분마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배우와 배경음악에도 호불호가 갈린다. 다만 지극히 주관적인 내 기준으로 좋은 영화는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도 자리를 뜰 수 없는 영화이다. 선과 악이 분명해서 기분 좋게 때려 부수고 끝나는 영화보다는 이상하게 무언가 마음이 불편해지는 영화가 더 오래 남는다.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던 내 기억 속 영화는 차이밍량 감독의 ‘애정만세’였지만 문라이트 역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배우는 흑인이다. 마약, 따돌림, 동성애 코드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는 자극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고 지극히 정적이고 감성적이다. 배우들의 섬세한 내면 연기에 힘입은 샤이론의 첫사랑은 그 어떤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보다 더 애절하고, 건장하고 화려하게 변한 겉모습과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더 절절하게 짙은 블랙의 외로움은 아이들에게 겉핥기식 다양성 교육을 행해 온 내 편견을 강하게 내려친다. 난 그저 살구색 껍데기에 둘러싸여 있을 뿐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의 고통이 절실히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외로움이 상황과 운명 때문일까 고민해본다. 그것이 일차적인 원인이 될 수 있겠지만 왠지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 교실의 모든 아이들은 크기는 다르지만 저마다의 힘듦과 외로움을 갖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유하기 힘든 인간의 근원적 외로움... 어느덧 영화는 마지막을 향해 나아간다. 마약 중독 치료를 위해 요양원에 있는 어머니를 찾은 블랙은 화해인지 용서인지 모를 눈물을 흘리고 10년 만에 케빈을 찾아 간다. 어쩌면 유일한 희망일 수 있는 설레는 기다림. 블랙은 외로움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얼마 후 문라이트와 함께 아카데미 작품상에 후보로 올랐던 또 다른 수작 ‘맨체스터 바이 더 시’를 보았다. 이 영화에는 하염없는 절망에 빠져 있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두 영화를 함께 떠올려 본다. 씻을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로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절망적인 삶을 사는 것과, 오래된 상처들을 안고 기약할 수 없는 기다림과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것은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울까. 요즈음 흔히 이야기하는 희망고문이라는 말 때문인지 몰라도 문라이트의 주인공인 후자가 더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교사가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장면도 자꾸 떠오른다. 따돌림의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샤이론이 교사에게 불려갔을 때 샤이론을 상담하는 교사의 얼굴은 정작 나오지 않는다. 그저 의미 없는 질문들의 오디오와 초점이 맞지 않는 혼란스러운 비디오만 겹쳐 맴돌 뿐이다. 나를 돌아보았다. 어쩌면 나는, 우리 교사의 말과 행동은 아이들에게 없는 존재는 아닐까? 유령에게 말을 걸어왔다고 자부했지만 유령은 아이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는지 모른다. 더 참담한 것은 ‘식스센스’의 주인공처럼 내 자신이 유령인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끔 주위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는 좋은 영화를 추천해달라고 말한다. 난감한 표정으로 몇 편의 영화를 이야기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극장 좌석을 떠나지 못할 정도의 좋은 영화를 본 지 너무 오래 되었다는 자책에 빠지기도 한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여유 없게 만들었던 것일까? 좋은 영화를 보고, 좋은 글을 읽고,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공연과 미술 작품을 느끼는 것은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의 밑바닥을 그대로 안고 내일도 아이들 앞에 서야 하는 것이 교사의 운명이겠지만, 심호흡 크게 한 번 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근원적 외로움을 그나마 위로해주는 ‘세상 어느 누구도 푸르게 만들어 주는 작은 달빛(문라이트)’이 나를 비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