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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lys Nov 09. 2017

화성오산평택 지역 혁신고 네트워크 활동을 하면서

넷*톡 / 허기영_ 화성반월고등학교(고등학교 서남권 네트워크 대표)

세 가지 이야기 - 안나 카레니나, 덩케르크, N선 눈을 가진 사람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구절을 떠올려 봅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몇 가지 풀이가 있습니다만, 가정이 행복하려면 이러저러한 조건들이 모두 충족되어야 하는 까닭에 그 가정들은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이 중 한 가지만 부족해도 불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집집마다 각자 다른 이유로 불행하여 불행의 풍경이 달라 보인다는 풀이에 마음이 갑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이 행복하려면 건강, 적당한 재산, 원만한 부부관계, 서로에 대한 사랑, 좋은 식사, 살기 괜찮은 환경 등 실로 많은 조건들이 필요합니다. 이 중 한 가지만 빠져도 행복하기 어렵습니다. 인생이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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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혁신학교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혁신적이고 민주적인 학교장, 학교혁신 의지와 능력을 갖춘 교사들, 배움중심수업, 적절한 부서편제와 인재배치, 학교 변화를 갈망하는 학부모들, 배움을 즐거워하는 학생들, 학교 교육과정 운영을 지원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갖춘 교육지원청, 학교혁신의 노력을 정책으로 뒷받침하고 격려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갖춘 교육청과 교육부, 학교가 동네에 들어선 것을 기뻐하고 아이들을 살펴주는 지역주민들……. 좋은 혁신학교가 되기 위해서는 참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라도 빠지면 쉽지 않습니다.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 학교는 혁신이 잘 안 되는 걸까? 고등학교를 혁신하는 일을 맡아 동분서주하다가 잘 풀리지 않는 고민을 품은 사람들이 네트워크로 모였습니다. 화성에서 오산에서 평택에서, 9개 학교입니다. 모두 고등학교이고 모두 혁신학교라는 동질성을 지니고 있지만, 모두 나름나름의 사정이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협의회에서는 서로의 어려움을 풀어놓고 서로가 무엇을 도울 수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도와줄 수 없는 것도 있고,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습니다. 그래도 조금씩 안면을 트고 서로의 학교를 알아가고 조금씩 속사정을 털어놓고 고등학교에서 혁신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끼리 통하는 고민을 풀 방법을 찾아봅니다.  


  혁신고 네트워크가 생기고 두 번째 해입니다. 혁신고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비로소 고등학교에서 혁신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를 깊이 들여다보고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올해 중요한 일은 성장나눔과 콘퍼런스 하는 학교들을 지원하고, 내년에 시작하는 개정교육과정을 혁신고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를 비교해보고, 혁신과제가 학교에 따라 어느 정도 진척되고 있으며 디딤돌과 걸림돌이 무엇인지를 분석해보고, 혁신부장으로서 어려움을 듣고 해결방법을 탐색해보는 것들입니다. 한 달에 한 번 만남으로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소통을 잘하기 위해 카톡방을 만들고, 정보를 모으고 공유하기 위해 밴드를 만들었습니다. 온라인 소통 첫 해라 그런지, 아직은 공식적인 알림이 대부분입니다.

  올해 6개 학교의 혁신담당자가 바뀌었습니다. 작년에 혁신업무를 하던 사람보다 새로 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서로를 알고 친해지는 과정이 중요한데, 시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들은 대개 혁신연구부, 교육과정혁신부, 창의지성혁신부 등, 혁신업무와 함께 큰 덩어리의 업무를 같이 맡고 있습니다. 수업을 바꾸고 평가를 바꾸고 방과후에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에도 열심입니다. 학교 밖 네트워크 활동을 열심히 하기에는, 사정이 만만찮습니다. 5시에 열리는 협의회에 못 오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협의 마치고 저녁 먹으러 가려면 시간이 늦어서 못 가는 선생님들이 많습니다.


  학교 밖 활동을 너무 열심히 하는 느낌을 주면, 학교 안에서 일하는 데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직 학교들은 안과 밖의 구별이 엄격합니다. 지역에서 고등학교 간에는 알게 모르게 이른바 서열이 있고 경쟁구도가 있습니다. 혁신담당자는 그렇지 않더라도, 학교는 그런 경쟁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유롭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서열을 높이고 경쟁구도에서 우위에 서려고 경쟁을 촉발하고 격화시키기도 합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이 있는 지역의 학부모들에게 경쟁에서 우월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고등학교라는 이미지를 심어줘야 합니다. 입학점수가 고등학교의 최대 경쟁력이라고 믿는 교사들, 아직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교사가 자생적으로 네트워크 활동을 한다는 개념을 아직 좀 낯설어 합니다. 교장·교감선생님들은 예전부터 장학협의회 같은 형식으로 견고한 네트워크를 운영해 왔습니다. 업무를 추진하기 위해서 교육청이나 교육지원청에서 공문을 보내 학생부장이나 연구부장 협의회를 소집하고 정기적인 모임을 주선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은 해오던 일이라 낯설지 않습니다. 그런데 평교사가 공문을 보내고, 연구회도 아닌 네트워크 활동을 한다는 개념은 낯설다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네트워크 활동에 출장 달고 나가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제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구조적인 어려움과 관행적인 인식의 덤불을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일, 좀처럼 바뀌지 않은 보수적인 교사문화에서 동료들을 설득하며 동참을 호소하는 일, 혁신은 혁신부에서 하는 업무 아닌가 반문하는 부장들에게 혁신은 학교 전체가 함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혁신담당자가 매일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덩케르크>의 한 장면. 한 시간 분량의 연료를 싣고 덩케르크 해안으로 출격한 스핏파이어 세 대 중, 조종사 한 명만이 민간인 요트에 구출되어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수많은 육군병사들이 걸어가다가 그 조종사를 보고 비꼬면서 말합니다. “(그 해안에서 육군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동안) 공군은 도대체 뭐한 거야?”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조종사에게 요트의 선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괜찮아, (공군조종사들이 육군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웠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스핏파이어 조종사가 한 대의 메서슈미트라도 더 격추시키기 위해 귀환을 포기하고 목숨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그걸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혁신고를 재는 이중의 잣대가 보이지 않습니까? 고등학교 일반에 적용되는 잣대에 부응해야 합니다. 간명하게 말하자면, 좋은 입시성적입니다. 이른바 상위 3개 대학 합격인원과 인서울 인원이라는 심플한 숫자로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를 한 줄로 세울 수 있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혁신고도 이 심플한 라인에 들어 있습니다. 동시에 현재의 고등학교를 혁신하는 모델이라는 잣대에도 부응해야 합니다. 이 두 잣대를 동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누가 어떤 검토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장에서 그런 일을 직접 해내야 하는 사람의 입장은 참으로 아크로바틱합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런 상황을 ‘고장 난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는 상태에서 수리한다’는 일종의 고난이도 곡예에 비유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마치 영화 <스피드>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시속 80킬로미터로 질주하는 버스에서 폭탄을 제거하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교육개혁은 그런 복잡하고 정교한 조작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의 혁신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지만, 어떤 혁신초등학교나 혁신중학교에서 일어난 멋진 변화가 혁신고등학교에서도 그러하게 일어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좀 안이한 판단이 아닌가, 입시 압력을 과소평가한 게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엄기호의 이야기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정치적 견해가 가장 오른쪽인 사람들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혁신학교를 선호하고 중간쯤의 사람들 역시도 그런 기대를 갖고 있다. 이들에게 초등은 혁신, 고등은 특목고라는 구분이 결코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 귀결이다. 사실 ‘특목고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공부를 못해도 된다’라고 생각하는 가장 왼편의 학부모들조차, 이런 자유주의 교육의 귀결점이 자기 자녀들이 무엇을 하던 ‘잘난 존재’가 되리라는 데에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고등학교에서는 유예되었던 학부모들의 교육적 열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적나라한 성공 욕망이 분출합니다. 상식과 교양, 혹은 아름다운 목표만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뜨겁습니다. 성공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대개의 고등학교와 교사는 입시경쟁력의 비교 우위가 없습니다. 엄청 분발해야 할 대상입니다. 이런 관점에 맞서 가장 앞에서 혁신의 정당함을 증명하고 학교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하는 일이 혁신을 담당하는 교사의 일입니다. 그런 대단한 일을 한다고, 특별히 다른 교사들보다 힘든 일을 한다고, 누가 알아주지는 않습니다. 맞습니다. 학교의 모두가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만, 고등학교를 혁신하는 일의 아크로바틱함을 이해하고 격려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네트워크는 그런 격려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올해 활동 중에서 발안바이오고에서 승마체험을 할 때 참석자가 가장 많았습니다. 모두가 어설픈 포즈로 웃고 사진도 찍고 즐거웠습니다. 시험 기간이라 일찍 모일 수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각각의 학교들이 가진 장점을 살려 재미있는 체험도 하고 서로의 감정을 교류하고 친해지는 시간을 많이 갖고 싶습니다. 쉽지는 않습니다. 혁신을 맡은 교사는 시험 때, 누구나 하는 서술형·논술형 채점은 물론 교사연수 주최하고 전문적 학습공동체 활동하느라 더 바쁩니다. 좀 여유가 있어야 할 텐데, 아직은 그런 사치를 누릴 단계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아무튼, 네트워크를 함께 하는 선생님들에게 격려를 보내고 싶습니다. “괜찮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요?



  

‘이동진의 빨간책방’ 팟캐스트에서 폴 콜린스가 쓴『밴버드의 어리석음』에 관한 대화를 들었습니다. 그 중 ‘N선 눈을 가진 사람, 르네 블롱들로’ 이야기. 블롱들로는 처음으로 N선이라는 방사선을 발견하고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당대 프랑스 최고의 과학자였다고 합니다. 사실 N선이라는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지요. 우연히 옆 눈으로 비껴본 것을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라고 착각했고 그걸 밀어붙인 겁니다. 그런데 많은 프랑스 과학자들이 자신도 N선을 봤다고 과학적으로 증명했답니다. 영국이나 미국 과학자들은 도통 N선을 볼 수 없어서 답답했는데 말이지요. 나중에 미국 과학자에 의해 N선의 허구성이 밝혀졌습니다. 그러자 그 많은 동료 과학자들이 앞다투어 자기들도 사실은 N선을 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웃픈 일이지요.

  고등학교에 N선은 없는지요? 블롱들로는 없는지요? “너희들, 공부 안 하면 농사(공돌이·공순이)나 짓게 된다.”라고, “3년만 참고 좋은 대학 가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라고 N선을 진리인 양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공허하고 모욕적인 말이 없어진 건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이겨야 해.”라거나 “공부는 혼자 하는 거야.” 같은 N선은 아직 남아 있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고등학교를 지배하고 있는 강력한 담론에 맞서는 일을 어느 교사 혼자 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학교 혼자 하기 어렵습니다. 네트워크는 개별 교사나 개별 학교로는 하기 어려운 일을 하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의 강점과 약점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연대의 힘으로 해결을 모색하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그 솔직함이 관건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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