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가 산책이라면, 필사는 달리기였다.

by 온마음

우울이 한참 내 안에 가득했을 때 매일 밤 잠들기가 쉽지 않았다.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책과 불안을 멈추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또다시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며 괴롭히는 생각들을 어떻게 하면 물리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내 생각이 아닌 다른 이의 생각을 따라 적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필사도 하게 되었다.


내 생각은 온통 부정적이었고, 불평이었고, 날이 서 있었다. 일기를 쓰려다 보면 온통 나를 탓하는 말들뿐이었다. 그러나 필사를 하면 달랐다. 작가님들께서는 할 수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마음을 강하게 먹어라라고 나에게 말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나는 그 말들에 내 마음을 맡겼고, 필사는 결국 나의 우울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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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직에서 일을 하다 보니 펜이나 연필, 다이어리, 포스트잇을 쓰는 일이 많았고, 나는 원체 귀여운 것들을 좋아했다.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파스텔톤의 형광펜, 포스트잇, 부드럽게 써지는 귀엽고 예쁜 펜들, 노트가 한가득이었다. 잿빛으로 변해버린 내 일상에 필사는 색을 입히는 시간이었다. 책을 읽고 필사를 하다 보면 내 일상이 자꾸 색칠 되었다. 노란색, 파란색, 분홍색으로 말이다. 그렇게 조금씩 색을 찾아가는 일상 속에서 나는 기쁨을 얻었다.


눈으로 하는 독서가 가벼운 걷기라면 손으로 쓰는 필사는 달리기 같았다. 다 쓰고 나면 숨이 찬 것처럼 손가락이 아팠지만 그 아픈 느낌을 느끼며 나는 내가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만년필의 사각사각 소리가 힘을 내라고 외치는 소리 같았다. 결국 나는 한참을 울었다.


"네 잘 못이 아니야. 이제 그만 슬퍼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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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만 읽었을 때는 그저 좋은 말이었지만 손으로 직접 쓰다 보니 문장들이 내 마음에 온전히 새겨진 느낌이었다. 손으로 쓰다 보면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만큼 깊이 있게 내 마음속에 머물렀다. 사각사각 소리가 귓가에 계속 머물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을 괴롭히던 나쁜 생각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들리지 않았다. 그 시간만큼은 정말 행복했고, 가벼웠고, 평온했다.


어쩌면 나는 필사를 통해 문장을 적은 것이 아니라 무너진 내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한 문장 한 문장 긍정적이고 좋은 문장들을 골랐다. 그리고 적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문장들을 적다 보니 한 달이 되었고, 한 달 동안 필사한 것을 모아보니 성취감과 뿌듯함이 내 몸을 감쌌다. 그렇게 쌓여가는 종이들이 나를 다시 세상 밖으로 그리고 인스타그램으로 이끌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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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예 까맣게 잊은 것은 아니다. 지금도 밖에서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슬프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젠 거기에 머물러 있기만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서는 책을 읽고 필사하며 어지러워진 마음을 정돈하고 정리한다. 그러고 나면 한결 마음이 가볍고, 지금 나에게 되지 않는 것들이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책을 읽고 필사를 한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더욱 그렇다. 수많은 작가님들의 생각을 내 마음에 새기며 하루하루를 쌓아가고 있다. 그렇게 나를 다듬고 내 생각을 다듬는다.


한마디를 덧붙이자면 내가 우울의 늪에 빠져있을 때, 묵묵히 나를 기다려주고 위로해 주고 사랑해 준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는 빠져나오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내가 더욱 건강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되어준 남편 덕분에 나는 오늘도 책을 읽고 필사를 하며 내 인생을 살아낸다. 그렇게 오늘도 하루가 흐른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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