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투명 페트병 안에 달팽이를 기르며 자급자족하라고 상추 씨를 그 안에 심어준 적이 있다. 상추씨인지 아닌지. 여하튼 뭐 그런 거.
물은 자주 줄 수 없는 상황이니 달팽이가 사라질 때까지 그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했다. 성체 달팽이는 안 키우게 됐지만 달팽이 알이 있어서인지 페트병 그대로 방 안에 두고 있었다
한참 후에 놀랍게도 깊은 곳에 있던 씨앗이 싹을 틔워 올라오는 걸 볼 수 있었다. 물은 따로 안 주었지만 햇살을 받고 그 안에 수증기가 생겨서 자체 물 공급이 되었나 보다.
그때 생각했다.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운다고.
그런데 텃밭을 가꾸다 보면 심었어도 싹이 안 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씨앗이 다 싹을 틔우는 것은 아니다. 으레 그러려니 했다.
얼마 전 작은 복숭아를 먹다가 온전히 씨앗을 꺼낼 수 있게 되어 호기심에 심어볼까? 하고 티슈에 물을 적셔 담가놓았다. 사실 하루는 그대로 두었더니 씨앗이 말라있었다. 그래도 무슨 대수랴. 씨앗이 마르는 건 당연한 거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하루 이틀 사흘. 마르지 않고 뿌리내릴 수 있도록 수시로 보면서 촉촉하게 해 주었다. 만약을 기대하면서.
그런데 오늘 보니 씨앗 표면에 하얀 곰팡이가 생기기 시작한다. 싹을 틔우지 못하고 흙이 되려고 한다.
보니까 그렇다.
씨앗도 같은 씨앗이 아닌가 보다. 영글지 않은 씨앗은 싹을 틔울 수 없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게 잘 묻어줘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씨앗 자체도 영글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싹이 트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가 바라는 것, 소망하는 것이 아무리 크고 조건이 잘 맞는 상황이 된다한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외부 조건이 열악하다고 하더라도 바라는 마음, 열망, 준비가 되어있다면 그것은 언젠가 때를 만나면 반드시 빛을 발하게 되어있다.
그러니 지금 외부 조건이 좋지 않다 하여 속상해할 것은 없다. 다만 해야 할 것은 언제 다가올지 모를 기회를 대비하여 준비해야 하는 것이겠다. 내가 영글지 않아 있으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보통 우리가 먹는 과일은 나무에서 충분히 다 익을 때까지 기다려서 수확하는 게 아니라 좀 덜 익었을 때 수확하여 후숙 하다 보니 씨앗까지 제대로 여물지 못하는 것 같다. 농작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그럴 것 같다.
고로, 외부의 조건이 맞을 때까지도 기다려야 하지만 내부의 조건, 씨앗이 영글 때까지도 기다림이 필요하겠다.
나는 지금 어디쯤일까?
그걸 파고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과정이 결과이고 결과는 다시 과정이 되는 까닭이다. 매 순간 씨앗이 영글어가는 마음으로, 땅 속에 묻혀 겉으로 드러나는 싹을 틔우기 전까지 깊이 뿌리를 내리는 마음으로 그냥 그대로 살아가면 좋겠다.
이것이 전부를 커버할 수는 없는 이야기겠지만 아주 작은 곳에라도 자신의 상황에 맞게 대입해보길 바란다. 오늘도 문득, 아점 먹다가 씨앗의 곰팡이를 발견하고 후다닥 써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