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도리탕은 매운 양념에 닭고기와 채소를 넣고 자작하게 끓인 한국식 닭요리를 일컫는 말이다. 일상에서는 널리 쓰이지만, 닭볶음탕이 맞는 표현이다. '도리'는 일본어로 새 또는 닭이라는 뜻인데, 거기서 유래되었다. ‘닭도리탕’은 결국 ‘닭닭탕’으로, 같은 의미가 중복되기도 한 데다, '도리'가 일본어이기 때문에 2011년도부터 국립국어원에서 ‘닭볶음탕’을 올바른 표현으로 정정 발표했다. 나는 X세대인데, 우리 세대는 엄마가 해주는 닭도리탕을 먹고 자라, 닭볶음탕을 해 먹는다. 사실 내가 어렸을 땐 자장면도 짜장면이 틀린 표현이 아니었고, 단무지도 다꽝이라고 했었다. 일본어의 잔재와 잘못된 언어 표기들이 점차 하나씩 바뀌면서 신세대였던 X세대도 꼰대세대가 되어버렸다.
닭도리탕도 엄마가 자주 해주시던 음식 중 하나였다. 사실 닭도리탕 같은 건 엄마보다 내가 더 잘 끓이는 건 맞다. 엄마는 맵고 빨갛고 단짠단짠의 음식은 주특기는 아니었다. 밖에서 먹는 맛의 닭도리탕을 끓이려면 생각보다 많은 양의 양념을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라면 수프도 한 개 다 안 넣고 김치를 넣고 시원하게 끓이시는 엄마에게 못 댄 맛 음식은 어려웠던 것 같다.
내가 피아노 뚜껑을 덮고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했던 날, 엄마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피아노 연습하기 싫어서 투덜대는 거라고 생각하셨다. 하지만, 집에 일주일에 한 번씩 오시던 미술 방문 선생님과 아주 긴 시간 상담을 마치고 나서 며칠 후 엄마는 당시 도곡동에 위치해 있던 미술학원을 지인에게 소개받아 오셨다. 그 미술학원은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네 집 근처였다. 그 친구분은 예전에 함께 쿠웨이트에 살면서 가까워진 친구였는데, 아들이 우리 오빠와 동갑이었으며, 그 아래로 나보다 한 살 많은 쌍둥이 자매가 있었다. 그 집에 놀러 가면 나는 쌍둥이 언니들과, 오빠는 오빠 동갑친구와, 엄마는 엄마들끼리 항상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미술학원 가던 첫날 오빠 학원 라이드 때문에 바빴는지, 다른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엄마는 나를 그 친구분 집에 내려다 주고 가셨다. 그리고 친구분은 우리 오빠와 나이가 같았던 오빠에게 나를 학원 앞까지 시간 맞춰 데려다주라고 하셨다. 생각해 보면 그날만 그런 게 아니었다. 쿠웨이트에서 이사 와서 처음 국민학교를 가던 날, 그날에도 엄마는 학교에 같이 가주지 않으셨다. 새로 사귄 앞집에 아들 둘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은 나보다 두 살이 많았고, 둘째 아들은 나랑 동갑이었는데, 엄마는 중학생인 오빠 학교 첫날에 함께 가기 위해 나는 아침 일찍 앞집에 맡겨두고 나가셨다. 앞집은 미국에서 살다가 온 집이었고, 그 집 어머니는 아들들을 미국이름으로 부르셨다. 나를 잘 챙겨서 데리고 가라고 신신당부하셨지만, 100미터 정도 걸어갔으려나, 그 후엔 그 형제들 뒷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나는 혼자 교무실로 갔었다. 교무실에서 담임 선생님을 만나 3학년 2반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서자, 당시 우리가 베이비붐 세데인 데다 학교부족으로 한 반에 80여 명의 학생들이 앉아있었는데 그 학생들이 전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칠판에 세로 방향으로 큰 글씨로 쿠웨이트 아메리칸 스쿨이라고 크게 쓰시고 나를 소개해주셨었다. 사실, 그날의 떨리는 마음보다, 미술학원 처음 가는 날이 더 떨렸던 것 같다. 그 오빠는 학원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긴 확실히 데려다주었지만, 혼자 계단을 올라 미술학원 문을 열고 들어가는 마음은 정말 어색하고 떨리다 못해 창피하기까지 했다. 그 미술학원에 5학년 학생은 나밖에 없었지만, 우리 엄마의 활발한 소개능력 덕분에 6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우리 학년 반이 16명까지 늘어있었다. 미술학원 수업은 평일에는 밤늦게 끝나지만, 주말엔 일요일 오전부터 주로 수업이 있고 5,6시경 마쳤다. 수업을 마치면 엄마가 나를 데리러 왔고, 바로 외식을 하러 종종 갔었는데 한두 군데 단골 식당이 있었다. 그중 한 군데는 닭도리탕집이었는데, 도착하면 항상 아빠는 소주 한잔 곁들여 먼저 한술 뜨기 시작한 후였고, 오빠 역시 식사를 시작한 후였다. 나는 닭도리탕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열심히 그림 그린 수고를 털어버리기라고 하는 듯 닭살을 발라 먹고 잘 익은 빨간 감자를 흰밥 위에 올려 으깨서 국물을 몇 술 더해 비벼먹곤 했다. 호로로 호로로 먹다 보면 밥 한 공기는 금방 뚝딱이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닭고기 귀신이었고, 식당에 가서 먹거나 집에서 먹거나 상관할 거 없이 닭도리탕은 한동안 내 최애음식이었다. 닭도리탕 안에 들어있는 노란한 감자 속까지 빨간 양념이 고루 배어 들어가 있어 한 입 배어물면 그 부드럽게 뭉그러지는 식감과 폭닥하게 으깨지는 따뜻함이 좋아서 몇 개고 계속 먹었다. 누군가는 닭껍질은 징그럽다고 안 먹을 테고, 누군가는 칼로리가 높다고 안 먹을 테지만, 난 닭껍질이 참 좋다. 닭도리탕에 들어있는 닭껍질은 젓가락을 가져다만 대도 쓰윽 분리가 되곤 했는데, 싹 벗겨내고 나면 고 아래 숨어있던 반질반질하고 보드라운 살이 나왔다. 닭도리탕은 뭐니 뭐니 해도 볶음밥이 정말 일품이다. 남은 국물에 감자를 몇 개 으깨고, 밥을 넣고 미나리나 부추 같은 아삭한 채소를 조금 넣고 김가루 넣고 참기름 둘러 잘 볶아낸 뒤 계란 하나를 톡 깨 넣으면, 그때부터는 다시 허리띠를 푸르고 시작해야 한다. 내가 어렸을 땐 여기서 끝났었는데, 요즘은 치즈를 듬뿍 올려야 끝이 난다. 언젠가부터 한국 음식엔 치즈가 꼭 올라간다. 퓨전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작은 유행이, 이젠 스타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아빠는 엄마가 첫 번째 암 수술을 마치자 좋은 공기 마시며 몸도 마음도 쉬라며 양수리 쪽에 집을 구하셨었다. 주중엔 서울에서 바쁘게 지내다가도 목금토일 이렇게 4일 정도는 그 집에서 쉬면서 지내셨다. 나도 결혼 후엔 종종 그 집에 가서 쉬었다 오곤 했는데, 특히 첫째를 출산한 후 그곳에 가면 아기도 꿀잠 자고 나도 푹 쉬었다. 아기가 낮잠을 잘 때면 엄마와 두런두런 얘기도 하고, 산책도 했다. 오랜만에 엄마가 해주는 밥도 먹고, 커다란 텔레비전 앞에 누워있으면 어디 멀리 가지 않아도 현실에서 벗어나 여행이라도 가있는 기분이었다. 그 집에서 강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작은 냇가 옆쪽에 식당이 하나 있었는데, 그 식당은 참 신기했다. 민물고기를 직접 잡아와서 매운탕도 조리해서 팔고, 식당 뒤쪽 닭장에서 닭도 키웠는데, 그 토종닭으로 닭도리탕이나 백숙도 가능했다. 그 모든 메뉴가 미리 예약을 해야 먹을 수 있는 메뉴였고, 엄마는 내가 양수리 집에 가는 날이면 미리 그 집에 전화해서 닭도리탕을 주문해두시곤 했다. 엄마는 그 식당아줌마와 친했다. 음식만 주문하는 게 아니라, 오디철이 되면 오디도 주문하고, 오미자도 주문했다. 그리고 내가 출산하고 나서는 잉어와 가물치즙을 주문해서 날 먹이셨다. 그 집 닭도리탕에 들어있는 닭은 토종닭이었기 때문에 젓가락으로 쉬 쭉쭉 찢어지는 질감이 아니었다. 약간 뻑뻑하리만큼 촘촘한 토종닭의 다리도 그날만큼 한쪽은 내 거였다. 양수리집은 내겐 다시 어렸을 적 멜로디가 흐르는 잔잔하고 행복이 가득한 집이었고, 우리 딸은 그 집을 단풍나무집이라고 불렀다. 마당에 아주 커다랗고 이쁜 단풍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 5년 정도 지났을 때였을까 아빠를 모시고 그 집에 갔던 적이 있다. 효도라는 건 참 어렵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참 힘들다. 그 집을 둘러보고 그 근처를 천천히 산책하며 엄마를 추억하고 싶었던 나의 바람과는 달리, 아빠는 한번 그 집을 보시고는 더는 계시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어떤 아련한 마음이었을까, 혹은 원망이었을까. 아무 말 없이 집에 가자고 하신 아빠의 마음속엔 어떤 색의 어떤 온도의 감정이 담겨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한참을 운전해서 집에 오는 길이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떤 행위를, 그게 얼마나 선할지라도 리엑션을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다는 것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확인하며 배운다. 나는 엄마가 좋아하던 냇가 옆에 그 식당도 가보고 싶었고, 엄마와 친한 아주머니도 보고 싶었는데, 어림도 없었다.
나는 닭도리탕에 떡을 넣는다. 감자도지만, 떡도 양념이 이븐 하게 베어 들어가 각각의 식감대로 매력 있다. 닭도리탕과 비슷한 요리로 닭갈비도 있는데 뼈가 없기 때문에 더 먹기도 쉽지만, 난 닭도리탕이 왠지 더 좋다. 이름도 귀엽고 어릴 적의 나와 함께 식사하는 기분이 들어서 유치한 행복감을 가득 느끼게 된다. 독일은 정해진 날에만 쓰레기를 버리는데, 일반 쓰레기는 2주에 한번, 유기농 쓰레기도 2주에 한 번이다. 음식물쓰레기는 유기농 쓰레기에 포함되는 건데, 2주 만에 한 번씩 버리려면 계산을 잘해야 한다. 쓰레기통에 악취가 나고 파리가 꼬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쓰레기 버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냉동실에 얼려보기도 하고, 따로 신문지에 돌돌 싸서 수분기를 없애보기도 했으나, 요즘엔 일반쓰레기에도 조금씩 급한 음식물 쓰레기는 신문지에 둘둘 싸서 버린다. 요즘은 그래서 상대적으로 닭뼈가 덜 나오는 닭다리만 사다가 볶음탕을 자주 해 먹었다. 그리고 닭다리는 형태가 쉽게 망가지지 않아서 요리된 모양도 보기가 썩 좋다. 지금은 닭볶음탕이 된 닭도리탕은 아직도 내 최애음식 중 하나다.
닭도리탕, 종이에 과슈, 2025 수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