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엄마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김애란의 단편소설 <칼자국>의 화자는 칼을 보면 엄마가 떠오른다고 했다. 엄마의 칼끝으로 자라난 아이의 모습이 상상되는 문장이었다. 나 역시 칼을 생각하면 식당을 운영하며 나를 키워낸 엄마가 떠오르는데, 내 경우는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달리는 엄마의 모습이다.
칼을 들고 종종거리며 불 위의 냄비를 어르고 달래는 모습은 사실 달리는 장면보단 반복되는 규칙성 속에 불규칙적인 움직임이 섞인 춤에 더 가까웠다. 송송 써는 칼 끝에는 무심함 대신 절박함이 서려있었고, 홀로 식당을 운영했던 엄마는 늘 발걸음이 바빴다. 손을 크게 베이어 피가 흥건했던 날도 엄마는 환부를 아무렇게나 동여맨 채 칼질을 이어갔다.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 때도, 식당 안에서 서빙을 할 때도, 새벽에 장을 보기 위해 급히 집을 나설 때도, 어린 내 눈에 엄마는 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스물아홉 살의 나는 두 개의 달이 뜨는 환상적인 세계로 안내되며 하루키 문학에 푹 빠졌다. <1Q84>를 시작으로 그의 소설을 탐독했고, 에세이로 넘어가 <먼 북소리>,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었다. 책은 책으로 이어져 국내의 김연수 작가가 달리기를 소재로 한 에세이 <지지 않는다는 말>도 붙잡았다. 두 작가가 자국에서 번역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까지 정독했으니 하루키가 이어주는 길은 길고도 넓었다. 그 시기에 나는 퇴근과 밤 독서시간 사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러닝화를 신고 집을 나서곤 했다.
어느 가을, 삼십 대에 들어선 나는 터미널 옆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을 읽었다. 창 밖으로 아기띠를 멘 한 아기 엄마가 보였다. 양손에 음료를 들고 허겁지겁 번갈아가며 마시고 있었는데, 지금이 아니라면 두 음료를 맛보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빨리 들이키는 모습이었다. 아기 엄마의 입과 손은 시종 달리고 있었다. 저 엄마는 시간에 쫓기는 건지, 아기에게 쫓기는 건지 궁금했다. 아기 엄마가 터미널로 사라지자 나는 여유롭게 잔 속 커피를 마시며 소설의 몇몇 문장을 필사했다.
몇 해 뒤, 나는 엄마가 되었다. 나는 식당일로 바빴던 엄마처럼, 터미널에서 허겁지겁 음료를 마시고 뛰어가던 아기 엄마처럼 달리지 않는다. 그저 여러 모로 달릴 뿐이다. 노산에 가까운 늦은 출산으로 체력이 고갈돼 아기를 오래 안으면 힘이 달렸다. 아파트 대출에다, 휴직으로 비어버린 통장을 보며 마통 한도를 어떻게 늘리나 고민하던 나는 돈이 달리는 게 무엇인지 (원래도 알았으나) 더욱 체감했다. 무엇보다 엄마로서 가져야 할 인내심과 희생정신이 달렸다. 낮엔 밤사이 못 잔 눈으로 퀭하고 밤엔 머리를 쥐어뜯으며 가슴에 반성문을 쓰는 날들이 이어졌다.
초보 엄마인 나는 아기가 처음으로 보여주는 모습에 환희를 느끼고, 아기의 얼굴이나 몸에 난 상처에 아파하며, 내 모자란 인내심에 자주 좌절감을 맛보고 있다. 환희, 고통, 좌절이라는 감정은 달리기에서도 느낀다. 그렇다면 나도 지금 달리기 중이라고 봐야 하나. 마라톤에서 숨이 턱 막힐 즈음, 5킬로미터마다 마련된 급수대에서 수분을 보충하며 활력을 되찾는다고 하는데 그런 규칙적인 주기가 내게도 꼭 필요하다. 달리는 사이 느끼는 통증을 줄여주고 에너지를 충전해주는 게 내겐 책이다. 하여 오늘도 아기가 잠든 밤마다 책을 조금씩 읽는데, 날이 갈수록 그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 야경증인가. 한의원에 가봐야 하나. 지금 두 돌이니 좀 더 기다려보자. 아기를 낳은 뒤 나는 책을 읽으며 (아기가 깰까 봐)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