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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과여름 Oct 15. 2021

아직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 엄마의 독서기

3년 전 엄마가 된 이후부터 세상에 많은 엄마와 아이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이전에 내가 보아왔던 ‘엄마’와 ‘아이’는 관념에 가까웠고 엄마와 아이가 함께 있는 모습은 풍경화의 배경과 같은 이미지였다. 출산 이후 ‘육아’와 ‘엄마’라는 말속에 얼마나 많은 함의가 들어있는지 직접 체험하며 알게 되었기 때문에, 엄마와 아이가 지나가는 장면은 풍경화의 중심에 있는 화면이 되었다. 눈여겨보지 않았던 주변 환경 또한 새롭게 보였다. 건널목까지 침범한 불법주차 차량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차량들을 헤집고 유모차를 운전하기란 얼마나 어렵고, 피해서 돌아가는 길은 또 얼마나 위험한지 엄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모를 일이었다.


출산 전 매일 퇴근과 다음날 출근 사이에 책을 붙잡고 매년 백 권 가량의 책을 읽었던 나는 2018년을 기점으로 한동안 독서생활을 꿈조차 꿀 수 없었다. 육아에 출퇴근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낮잠 시간 동안 틈새 독서를 했으나 독서량은 형편없었다. 하루에 몇 글자라도 온전히 읽을 수 있다면 그 또한 다행한 일이었다. 어디 한 군데 아프지 않고 아이가 낮잠을 조금이라도 잤다는 뜻이니까. 무엇보다 독서생활의 큰 변화는 어떤 책을 읽더라도 모든 책은 육아서처럼 읽힌다는 것이었다. 십진 분류표상 내가 좋아하는 800번대와 900번대의 책을 500번대와 진배없다고 느꼈다. 육아하는 엄마가 독서할 때 겪는 육아서 깔때기화 현상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으면서도 여지없이 육아서 깔때기 현상이 일어났다. 10대와 20대에 읽었더라면 아마 다른 곳에 눈길이 갔을 이 책을, 30대 후반의 육아 중 엄마가 읽으면서 눈길이 머문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었다.


28. 그것은 아버지의 신성함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내 유년 생활을 떠받치고 있던, 그리고 누구든 자신이 되기 전에 깨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우리 운명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선(線)은 아무도 보지 못한 이런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칼자국과 균열은 다시 늘어난다. 그것들은 치료되고 잊히지만 가장 비밀스러운 방 안에서 살아 있으며 계속 피 흘린다.


이유식을 시작으로 엄마는(또는 아빠가)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손에 익지 않은 칼을 다. 서툰 솜씨로 가끔 엄마는 자신의 손에 상처를 내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칼질은 익숙해지고 칼 끝에서 아이는 단단하고 여물어간다. 아이는 점점 자라 부모에게 말할 수 없는 자기만의 공간을 늘여간다. 부모와 함께 머무는 세계, 부모가 모르는 아이의 세계의 경계에서 아이는 세계의 균열을 보고 종종 부모의 폐부를 찌르는 칼자국을 남긴다.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부모에게 처음 그은 칼자국은 크로머를 만나고 서였다. 무리에서 배제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물건을 훔쳤다는 거짓말을 했던 싱클레어는 크로머에게 약점을 잡혀 금품을 빼앗긴다. 크로머와의 관계에서 고통받으나 부모님이 계신 안락한 세계에 이를 알리지 못한다. 싱클레어는 머리맡에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주었으면 바라기도 하고 부모가 자신의 일을 알지 못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사춘기의 청소년이 맞닥뜨리는 주변 세계에 대한 고민이란 측면에서 수 클리보드의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가 떠올랐다. 그 책은 컬럼비아 고등학교 총기사건의 가해자 두 명 중 한 명의 어머니가 쓴 수기이다. 수 클리보드가 사건 이후 뼈아프게 후회하는 것은 ‘아이에게 잔소리하며 어깨를 밀치는 행위를 한 대신 그 손을 어깨에 대고 내 품으로 끌어당겼더라면’, ‘아이에게 간섭한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아이의 일기장을 샅샅이 파헤쳐 아이가 고민하는 걸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이었다. 입에 빗장을 걸어 잠근 사춘기의 아이, 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과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양가감정 사이에서 헤매는 자녀에게 나는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까란 고민을 하게 만든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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