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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과여름 Oct 20. 2021

육아하는 이는 시지프스일지라도

태양과 눈 아래에 선 시지프스

69.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 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다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아직 읽어보지 못했으나, 이 문장에서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로 옮기는 시지프스가 떠올랐다. 정상 근처에 오르면 다시 떨어지는 큰 바위를 영원히 들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는 그의 모습은, 벗어날 수 없는 햇빛 속으로 한 걸음씩 발을 내딛는 뫼르소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과 같을 거란 생각에 한없이 무기력하던 육아 중 육아하는 부모는 시지프스인가 생각하곤 했다. 치웠는데 돌아서면 같은 자리에 다른 장난감으로 어지럽혀진 매트, 소꿉놀이 바구니를 정리하고 나면 1분도 안 되어 엎어버리는 아이 곁에서 ‘이건 형벌이야, 형벌.’ 속으로 되뇌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사실 육아 중에만 이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다. 나는 어느 때고 다른 이유로 자주 이런 생각에 빠지곤 했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구나 무거운 바위를 이고 어딘가로 향한다. 태양이 그 모습을 본다면 마치 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하는 포로들이 긴 행렬을 이루는 형국일 것 같다. 샘물을 찾고, 물속을 유영하며 내 주변에서 나를 짓누르는 태양으로부터 나를 숨기려 해 봐도 내가 죽기 전까지 태양 아래에 살아가야 하는 건 변치 않다. 태양의 의미가 지겹게 흘러가는 일상의 권태이건, 나를 못 견디게 내리누르는 스트레스이건, 내가 저지른 혹은 저지르고 있는 크고 작은 죄과이건, 나를 옭아매는 사회적 시선이나 인습의 굴레이건 태양은 매일 낮 나를 비춘다.


어떤 사람도 자의로 태어나지 않고, 언제 어떠한 형태 –자연노화(뫼르소 어머니의 죽음), 갑작스러운 사고사(아랍인의 죽음), 예정된 죽음(집행을 기다리는 뫼르소)- 로 생을 마감할지도 알 수 없다. 생의 순간순간마다 세상과 타인으로부터 유리되고, 때론 내가 나로부터 소외되는 기분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방인>을 읽으며 세상은 부조리하고, 살아가는 건 부질없는 짓이라는 깊은 허무감에 빠지지는 않았다. 이런 기분은 가와바타 야스타리의 <설국>을 읽을 때와 비슷했다. 뜨거운 태양과 냉혹한 눈이라는 대조적이지만 선명한 감각, 화자가 선 곳으로 이끌려가는 압도적인 힘을 느낄 수 있었다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생은 부조리와 허무로 뒤범벅되어 있으나, 그걸 보여주는 소설을 읽으며 지금 내가 여기에서 살아있다는 감각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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