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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과여름 Aug 09. 2022

달리기와 나

달리기의 시작

내 기억 속 최초의 달리기는 무리에서 이탈되지 않기 위해 뛰었던 일이다. 동네 꼬마들 중에 나이 많은 언니, 오빠가 윗동네로 가서 놀자 외치면 조무래기들이 계속 놀기 위해 기를 쓰고 달렸던 일들. 조금 더 자라선 동네에 소독차 소리가 들리는 날, 소독차 꽁무니가 내뿜는 연기와 냄새를 좇아 뛰다 어느새 시들해져 돌아왔던 기억들.


그러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더 이전의 달리기가 있다면(그것도 달리기라 할 수 있다면) 엄마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엄마를 쫓아갔던 일일 것만 같다. 이제 그만 가자는 말을 듣지 않고 떼를 부리던 내 손을 엄마가 놓고 저만치 앞서 가버리면 나는 두려워하며 엄마와 거리를 좁히려 발을 부지런히 놀렸을 게다. 기억 속엔 없지만 있었던 일이라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작년 친정엄마의 말을 듣고서였다.


“엄마, 아이가 놀이터에서 두 시간을 놀았는데도 더 놀고 싶은지 집에 안 가려고 해. 가자 가자 아무리 말해도 다른 걸로 꼬드겨도 안 넘어오네.”


“그럴 때는 엄마 먼저 간다 하고 앞서 가면 돼. 거리가 좀 멀어진다 싶으면 애가 울면서 얼른 엄마를 쫓아오거든.”


그러니까 엄마의 말속에 나오는, 쫓아오던 아이가 어린 내 모습이었다는 것 아닌가. 지금도 성정이 부지런하고 몸놀림도 재빠른 엄마가 다소 위협적인 목소리로 지금 안 오면 엄마는 가버린다, 말하고 발을 떼 버렸다면 서너 살의 나는 얼마나 겁이 났을까. 엄마와 멀어질까 봐, 엄마가 안 보일까 봐, 엄마가 나를 버릴까 봐.


오늘날 육아서에는 지난날 엄마가 썼던 방법이 좋지 않다고 입을 모아 말하지만, 가끔 육아서에 쓰인 글들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만큼 정신과 몸이 분리되는 날이 있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내 입은 엄마 먼저 간다, 말해버리고 아이는 우는 소리로 발을 재게 놀리다 내게 뛰어온다. 달려온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갈 때엔 참지 못하고 말해버렸다는 후회와, 성마른 성격을 탓하는 자기혐오가 땀에 전 티셔츠처럼 내게 쩍 달라붙어 버린다. 티셔츠는 세탁기와 건조기로 깨끗이 빨고 말릴 수라도 있지, 내게 새겨진 후회와 혐오의 감정은 짙어지기만 했다.


아이를 낳고 많은 것이 변했다. 유모차를 끌고 혼자 가는 엄마만 봐도 눈물이 났고, 세상의 아이들은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귀하지만 그 아이를 키우며 흘린 부모의 눈물이 더해져 더 귀해 보였다. 속싸개에서 꼬물거리던 작은 아이가 품에 가득 들어올 때, 보드랍던 살들이 단단하게 여물어갈 때, 신기하고 뿌듯하기도 했지만 내 얼굴과 몸은 시들어갔다.


긴 휴직의 끝을 앞두고 작년에 복직원을 쓰러 간 날, 관리자가 내 얼굴을 보더니 한마디 했다.

“얼굴을 보니 고생한 흔적이 많으시군요. 인생이 많이 고단하신가 봅니다.”


내 아이는 피어나는데 나는 시들어만 갔다. 꽃이 피고 지고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듯, 새로운 생명이 빛을 내고 그 생명을 세상에 내놓은 모체가 시들어가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 이건만 나는 조금 억울했다. 아니 많이 억울했다. 이 억울한 마음의 근원은 내 노화 현상- 노화를 가속화시키는 육아환경-에 대한 울분은 아니었다. 예쁘게 피어나는 아이를 예쁘게 바라보지 못하는 내 시선, 정확히 말하면 약해빠진 체력과 수시로 덮쳐오는 몸 곳곳의 통증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맑지 못하다는 게 속상해서였다.


‘지금도 이렇게 나는 버거워만 하는데, 복직 후에 아이에게 온화한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아침, 저녁으로 짧게 만나는 아이에게 괴물이 되지 않을까?’


육아를 통해 깨닫게 된 한 가지는 인성은 체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타고난 본성은 바꿀 수 없고, 기를 수 있는 덕성은 교육을 통해 상당 부분 바뀌었을 테지만 사람이 겪어보지 못한 극한 환경에 처하면 인성의 밑바닥이 점차 드러난다. 당장 내 잠이 부족해서 퀭하고, 수면 부족이 몇 년 간 이어지는 데다 허리와 목의 통증마저 수시로 덮쳐온다면 놀아달라는 아이의 말에, 놀이터에서 한 시간 더 놀겠다는 아이의 요구에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더욱이 복직 후 밖에서 에너지를 다 쏟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 아이에게 웃어줄 힘이 남아 있지 않다면 일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나와 아이의 정신적 생존을 위해 운동을 결심했다. 마흔을 몇 달 목전에 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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