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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과여름 Aug 15. 2022

달리기를 하고 나서 생각한 것

지지 않는다는 말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는 이런 유명한 문장이 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은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작가는 피츠제럴드를 얼마나 흠모하는지 밝히고 있다. 나는 작가도 뭣도 아니지만 8주간의 런데이를 끝냈다는 자부심과 김연수 작가에 대한 애정을 담아 그 문장을 이렇게 바꿔본다.


‘지지 않는다는 말을 세 번 이상 읽은 사람은 10킬로 대회에서 만날 수 있겠다’


김연수의 이 산문집은 달리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묻어나는 책이다. 봄밤이든, 습한 여름날이든, 스산한 가을날이든, 눈 쌓인 겨울이든 발바닥을 근질거리게 하는 책이다. 런데이를 시작할 마음이 있거나 하는 중에 읽으면 더 좋을 책이다. 달리기에 관심 없는 사람이 읽어도 좋다. 나는 런데이를 시작하지 않았을 때도 작가의 산문집 중 이 책을 가장 좋아했다.


p8. 내게 달리기란 이를 악물고 달려야만 만점을 받을 수 있는 체력장의 오래 달리기, 아니면 낙오하게 되면 나로 인해 모든 소대원들이 기합을 받게 되는 산악구보 같은 것을 의미했다. 다른 누군가를 이기지 않는다면, 결국 패배자가 된다는 것, 그리고 이 패배자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 내게 스포츠란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기만 했다. 과연 이기지 않는 것은 패배를 뜻하는 것일까?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내가 체력향상을 위해 런데이를 시작하게 된 배경에는 중학교 체력장을 하던 날의 풍경이 자리한다. 나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최하등급을 받았던 터라 오래 달리기를 끝까지 할 수 있을지 시작부터 걱정이 많았다. 시작 신호에 일제히 나와 멀어지며 앞서가던 친구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번에도 내가 꼴찌구나’ 좌절하고 ‘그래도 내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다른 친구들에게 안 보여줄 수 있겠다’ 조금은 안도하면서 달리는데, 속도에 큰 변화 없이 달리던 내 뒤로 처지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마지막 바퀴에는 남아 있던 힘을 쥐어짜 내 전력질주를 해 제법 상위권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두려움에 지지 않았다는 것,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착했다는 것, 운동회 5인 1조의 백 미터 달리기에서 친구 한 명이 넘어져 4등으로 도착했던 게 최고 기록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굉장한 경험이었다.


p42.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다. 세상의 기쁨과 고통에 민감할 때, 우리는 가장 건강하다. 때로 즐거운 마음으로 조간신문을 펼쳤다가도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물론 마음이 약해졌을 때다. 하지만 그 약한 마음을 통해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된다. 마찬가지로 가장 건강한 몸은 금방 지치는 몸이다. 자신은 지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약한 것들은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리고, 쉽게 상처받고, 금방 지치는 사람이다. 다행히도 원래 우리는 모두 그렇게 태어났다.


아이를 낳고 나는 마음과 몸이 모두 아팠다. 작가는 세상의 기쁨과 고통에 민감할 때 우리는 가장 건강하다고 했는데, 나는 세상의 기쁨과 고통에 둔감해지고 1인분의 책임감과 피로를 견뎌내지 못해 허덕이고 있었다. 너무나 금방 지치고, 여린 본성은 더욱 예민하게 바뀌고 주변의 사소한 한마디와 아이의 칭얼거림에 화가 솟구치고 감정이 널뛰었다. 아이의 세 돌이 지나도 비슷했으니 내 안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내면의 문제는 육체와 연결되고 마음을 다스리자면 몸에 변화를 주는 방법이 우선일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끝도 없는 육아, 보이지 않는 내 노동과 희생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으므로 무언가 눈에 보이는 기록을 얻고 싶었다. 그게 설사 스물네 번의 짧은 달리기 기록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8주간의 달리기를 완주하던 오늘, 끝났다는 런저씨 (달리기 어플 '런데이'의 코치)의 목소리를 듣고 울음을 터뜨렸다. 마지막 30초를 남겨두고 힘이 남아 있으면 전력 질주해도 좋다는 말에 종료 알람이 들릴 때까지 힘차게 달리고 난 뒤였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왔나 생각해 봤다. 끝까지 해냈다는 뿌듯함의 눈물은 아니었다. 마지막 바퀴를 질주했던 열네 살의 건강했던 내가 그리워서도 아니었다. 쉬지 않고 페이스 조절을 하며 달린 30분이 오늘 하루 중 아이와 실랑이하던, 내가 다섯 살 아이처럼 아이와 함께 화내던 그 30분의 시간보다 힘들지 않았던 걸 깨달아서였다. 30분 육아보다 30분 달리기가 더 쉬운 날도 있다는 건 그만큼 육아가 어렵다는 말일 테다. 그래, 나는 그 어려운 걸 30분이 아니라 몇 년을 해왔다. 그리고 아직 십여 년이 더 남았다. 내 몸과 내 페이스는 나의 호흡과 발에 맞춰 조절할 수 있지만 아이와 2인 1조가 되는 육아는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구나. 어렵고 힘든 일을 해왔고 해 나갈 거구나. 그렇다고 패배감을 떨치고 자신감을 얻기 위해 시작한 이 달리기가 의미 없는 건 아니었다. 내 몸을 살피며 뛰던 그 감각을 기억하며 아이와 대치 상태가 될 때 런데이 시작 버튼을 누르듯 ‘나는 어른이다. 화를 내지 말고 적절한 훈육을 하자’ 모드로 돌입해보자고 다짐한다.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할 거란 것도 안다. 그런데 어쩌겠나. 나는 길고 긴 장거리 선수로 돌입한 것을. 페이스를 잃을 것 같으면 다시 조절해서 맞춰갈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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