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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과여름 Aug 22. 2022

엄마는 언제나 달리는 중

아무튼, 달리기

아직 러너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달리기 초보는 달리면서 생각할 만한 게 별로 없다.


달리기 전에는 여러 생각을 한다. 운동화를 신으면서 ‘아이가 문 닫는 소리에 깨면 어쩌지? 아이 아빠가 있어도 끝방에서 TV 보며 낄낄대느라 우는 소리도 제대로 못 들을 텐데.’, ‘아무리 더워도 뛸 테지만 그래도 어제보다 덜 습했으면 좋겠다.’와 같이 집에 두고 온 어린 자식이 깰 일이나 그날의 날씨 걱정 정도다.


달릴 땐 런저씨(달리기 어플 '런데이'의 코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느라 다른 생각이 깊이 들지 못하고, 완주까지 페이스 조절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잠시 스친다. 그러나 코너를 돌 때 ‘개를 만나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은 자주 든다. 기침으로 인기척을 한 뒤 거리를 넓게 두고 지나가도 개가 짖는 때가 몇 번 있었고, 개 두 마리가 양쪽에서 나를 향해 짖을 땐 그날의 달리기를 포기해버리고 싶을 만큼 아찔했다.


이렇게 쓰고 나니 나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8주 차 달리기 마지막 날, 종료까지 30초 남겨두고 아직 남은 힘이 있으면 힘차게 달리라는 런저씨의 말(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에 나는 그날의 남은 모든 힘을 짜내 전력 질주했다. 종료음이 울리고 여느 때처럼 만세를 외치다 서머싯 몸의 책 <인생의 베일>의 한 문장이 생각났다. 아내 ‘키티’를 사랑했으나 그녀는 불륜을 저지르고, 그녀와 자신을 벌하기 위해 역병이 창궐한 지역으로 간 의사 ‘윌터’가 죽기 전 남긴 유언 “죽은 것은 개였다”는 말.


이 한 문장은 영국 시인이 남긴 시에서 나온 것으로 주석이 달려있다. 어떤 남자가 잡종개와 친구가 되는데, 그 개가 광견병에 걸려 남자를 물자 사람들은 모두 물린 이가 죽을 거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결국 남자는 낫고 죽은 것은 개였다는 것.


며칠에 한 번씩 러너가 되는 과정에 있는 내게 ‘개’의 의미는 ‘방해자’다. 나의 달리기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 나의 페이스를 엉망으로 만들고 스텝을 꼬이게 만드는 방해꾼. 그렇다면 육아가 인생 최대의 난제이고, 워킹맘으로 사는 게 너무 두려워 운동화를 고쳐 매고 나오는 내게 길 밖의 ‘개’는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내 아이를 지나치게 걱정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본디 자존심은 있어도 자존감은 떨어지는 이로 엄마가 되기엔 꽤나 부족한 사람이었다. 작은 성공 경험을 토대로 자신감이 생기고 자존감도 상승한다는데, 나는 육아 중 성공경험이 별로 없었다. 육아서를 읽고 아이에 맞게 적용해 보려 해도 번번이 빗나갔다. 아이는 작은 소리에도 깼고, 다섯 살인 지금도 엄마가 곁에 없으면 수시로 깰 만큼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아 내 불면증은 4년간 지속됐다. 또래보다 자라는 속도도 더디고 놀이터에서 내 아이만 심하게 떼를 부리는 것 같을 땐 어디든 구멍이 있으면 아이를 안고 빨려 들어가고만 싶었다.


18. 심야의 뜀박질은 그때마다 나를 수렁에서 건져 올렸다. 뛰는 순간만큼은 근육부터 호흡까지 몸의 변화에만 집중하며 생각을 비워냈다. 멘탈에 놓는 모르핀 주사처럼, 도무지 떨치지 못하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달릴 때는 잠시나마 자취를 감췄다. 더불어 목표했던 거리를 어렵사리 완주해내면 그 자체만으로도 용기를 얻었다. 자존감의 회복은 위대한 성과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오히려 일상에서 마주치는 작은 성취가 금 간 마음의 빈틈을 메우고, 그런 성취들이 모여 단단한 삶의 방파제가 되어준다. 짧은 거리라 할지라도, 혹은 빠른 속도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세운 목표를 어떻게든 달성할 때면 어김없이 자기애를 손에 쥐었다. 일상의 끄트머리에서 움켜쥔 그 성취를 이불 삼아 불안에 떠는 몸을 녹이고 유독 길었던 하루에 마침표를 찍곤 한다. - 김상민, <아무튼, 달리기>


육아하는 엄마는 언제나 달리는 중이다. 페이스의 완급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안정적인 달리기가 아니라 외부 상황에 따라 쉽게 휘청이는 뜀박질에 가깝다. 시원한 날 평지를 뛸 때도 있지만, 덥거나 춥거나 안개 낀 날에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결승점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열심히 달린다고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예측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나처럼 불안감이 높은 장거리 러너라면 단거리 러너로서의 성공경험이 꼭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밤의 뜀박질이 좋다. 그날의 부정적인 감정을 켜켜이 쌓아두지 않고 털어버리는 하나의 방법이다. 페이스는 날마다 다르지만 30분 완주했을 때마다 받는 도장은 착실히 쌓인다. 그 도장이 내가 내게 주는 확실한 성공경험이다. 육아의 성과는 잘 보이지 않지만, 오늘의 달리기는 성공이란 것. 마음 한편에 자리한 불안감을 성취감으로 바꾸는 것. 내가 내게 쳐주는 박수이자 점수 대신 그려주는 동그라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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