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가을 사이의 밤에 달리면 풀벌레 소리와 규칙적인 내 숨소리가 들리는데, 달릴 땐 아직까지 다른 생각이 깊이 끼어들지 못한다. 잠깐 들었다 다시 흩어질 뿐이다. 숙련된 러너들이 갖는다는 생각의 빈틈이 아직 만들어지지 못한 탓이다.
달리기를 마치고 마무리 걷기를 하다 보면 주변에서 걷거나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보인다. 실내체육관 창문 너머로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한 사람은 내 아이보다 한 살 어린아이의 엄마다. 놀이터에서 아이의 걸음마를 도와주다 알게 된 그 엄마는 “계속 휴직하세요? 좋은 직장에 다니시네요. 저는 날짜가 픽스라 곧 나가야 해요.”라고 말했었다. 그녀는 복직한 뒤부터 언제나 피로하고 화나 보였다. 밤에 본 그 엄마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필사적으로 운동했다. 몸매 관리나 즐거움을 위해 운동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살기 위해, 아이와 같이 잘 살기 위해 운동하는 얼굴이다. 나는 같은 얼굴로 아파트 둘레를 뛰고, 그 엄마는 러닝머신에서 달린다.
러닝머신 밖에서는 모녀가 나란히 걷고 있다. 중년의 엄마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딸과 걷는 길은 뭔가 평온하다. 이 모녀의 모습에서 놀이터에서 실랑이하느라 지치고, 오늘도 울리고 업고 온 나와 내 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내 눈에 들어온 세 종류의 여자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이름도 애잔한 작가 김애란의 단편 <서른>의 한 문장이 떠오른다. ‘너는 커서 내가 되겠지.’
10대 후반의 딸은 열심히 공부해서 직업적 성취를 이루고 엄마가 되어 며칠에 한 번씩 밤에 나와 필사적으로 달리겠지. 일도 육아도 놓칠 수 없는데 다 잡고 있기엔 너무 버거워서 시뻘게진 얼굴을 한 채. 그리고 이만하면 많이 키웠다 한숨 돌리면 건강을 걱정할 40대, 50대가 되겠지.
소리 내어 부르면 뭔가 애달픈 김애란의 소설이 계속 떠올랐다. 나는 왜 그녀의 소설에 나오는 아빠들은 실없는 농담만 자주 하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부족하고, 자주 자리를 비우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달려라 아비>란 소설 제목을 <어미는 달린다>로 고쳐 쓴다면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했다. 깊이 궁금해할 것도 없이 단편 <칼자국>에 달리는 엄마가 나온다. 한평생 칼을 손에 쥐고 아이를 먹이고, 공부를 시키고, 생의 마지막 날까지 주방에서 보낸 사람.
p20. 한번 벌어진 상처는 좀체 아물지 않았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고 양념 대부분을 맨손으로 쥐어 양은솥에 뿌린 탓이다. 어머니는 요리와 서빙, 계산, 청소, 설거지를 혼자 다 했다. 그래도 돈 모이는 게 신이 나 하나도 힘든 줄 몰랐다 했다.
이건 바로 내 엄마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릴 땐 입이 꽤 짧았으나 자라면서 식성이 아주 좋아진 사람이 나였고 지금의 나를 여물게 만든 건 엄마의 칼끝이었다. 먹는 건 잘하지만 주방에 서있기는 싫어했던 나도 아이를 낳고 주방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지금 내 나이 때 엄마는 해물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의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나는 작은 주방에서 칼을 쥐고 꽃게와 새우를 손질하거나 채소를 다듬는다. 아이가 “엄마 생선 구워주세요.”, “엄마 가지 나물이 먹고 싶어요.” 하는데 어찌 흘려듣겠는가. 한입 먹고 냉장고에 들어간 다음날이면 아이에게 외면받을 나물이라 하더라도 씻고 썰고 데치고 무칠 수밖에.
그러나 엄마와 나는 음식을 만드는 속도와 맛에서 큰 차이가 났다. 아이는 귀신같이 할머니가 보내준 북엇국과 내 북엇국의 맛이 다르다는 걸 알았고, 만든 사람에 따라 먹는 양이 달랐다. 친정에 가서 이런 일을 푸념하자 엄마는 마치 중요한 고백이라도 하는 듯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엄마도 사실 네 나이 때는 나물을 이렇게 맛있게 무치지 못했다. 다른 반찬도 그렇다. 그래서 너한테 맛있는 걸 많이 못 만들어줬다. 나는 네가 늘 걸렸다. 어려선 맛없는 엄마 밥 먹고, 나이 들어선 객지에서 퇴근하고 지쳐서 자주 사 먹는 게.”
아이를 낳기 전 김애란의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다가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아보고 싶어서 부모가 된다’ 란 문장에 이르러 나는 한참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럴 마음으로 부모가 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엄마라는 무게가 무거울 것만 같고, 행복한 아이로 키울 자신이 없고, 그만한 책임감을 내가 가졌는가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을 못했다. 슬프게도 부모가 된 지금도 나는 그 문장에 공감할 수 없다. 그런데 몸이 계속 아픈데도 주방에서 칼질을 하고 택배를 부치는 엄마의 마음에서 그 문장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엄마의 칼질은 ‘내 딸이 다섯 살일 때 잘해주지 못한 걸 손녀에게라도 잘해주고 싶어 하는’ 할머니의 마음이자, 지금의 손녀만큼 다섯 살 딸아이를 따뜻하게 바라봐주지 못한 게 미안해서 멈출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 내게도 할 말은 있다. 다섯 살의 나를 짠해하는 엄마에게 말이다. 나는 손님이 없는 방에 혼자 놀면서 신문지를 접거나 볼펜으로 신문 표제어를 따라 그려보는 것도 재밌었다고. 방 너머로 풍기던 구수한 해물탕 냄새에 기분 좋게 침이 고였다고. 옆 가게 술집 언니들이 나를 봐줄 때 풍기던 진한 화장품 냄새도 신기했고 언니들한테 받은 아이참을 붙이는 것도 스티커 놀이보다 더 재밌었다고.
그래서 나는 복직한 뒤 내 딸아이를 많이 애잔해하지 않기로 하고 몇 가지를 다짐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굉장히 숨찬 하루가 이어질 테지만 나는 꾸준한 달리기로 호흡을 조절할 것이고,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해물탕은 직접 만들어주겠다만 나머지 반찬은 배달해서 먹겠다고. 지속가능한 엄마가 되기 위해 나는 페이스를 조절해서 계속 달려 나갈 거고, 너는 커서 내가 되는 게 아니라 나보다 조금은 더 편안한 삶을 살 거라고 믿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