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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과여름 Oct 14. 2021

독서가 내게 남기는 것

느린 독서가가 김영하의 <읽다>를 읽다가

독서모임의 마지막 날, 진행하신 분이 여러 고전 소설과 김영하의 『읽다』를 언급하셨는데, 모두 내가 읽어본 책이었다. 문제는 몇몇 등장인물과 대략적인 줄거리만 기억날 뿐 나머지는 내게서 말갛게 지워졌다는 것. 그 책들을 읽었던 시간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자조의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순백의 머리를 가진 사람이 어떤 책을 읽었다면 그 책은 순백의 머리를 가진 사람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의문도 들었다. 사실 읽지 않았을 때의 나와 읽은 후의 나를 비교해 볼 수도 없으니 영원히 의문의 영역에 둘 질문이었다. 평행우주에서 『마담 보바리』를 읽은 나와 읽지 않은 나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면 또 모를까.


주말에 『읽다』를 다시 읽어보았다. 이런 멋진 문장을 보았나! 경탄하며 플래그를 붙여놨는데, 왠지 기록이 남아 있을 것만 같아 서랍에서 2016년 독서기록장을 찾아보았고 거기에 『읽다』를 읽고 필사한 문장들을 읽으며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내가 플래그 붙여놓은 부분과 정확히 일치해서다. 정말 내 머리는 순백이구나. 얼음이 된 내게 아이는 투덜댄다. “엄마는 책 보고 아빠는 회사일 하고 왜 나는 아무도 안 돌봐주는 거야!” 아이를 제쳐놓고 책을 본 시간은 기껏 10분이었고, 아이 아빠는 방에 틀어박혀서 치킨을 혼자 뜯고 있었지만, 사실대로 얘기하면 닭고기 달라 시위할 게 뻔하므로 나는 『읽다』를 잊고 아이와 놀기로 했다.


나와 달리 (아빠를 닮은 게 확실하다) 책보다는 블록과 퍼즐을 더 좋아하는 아이지만 가끔 책을 많이 읽어달라고 조르는 날이 있다. 자고 싶지 않아서다. 자정까지 자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은 무엇인가. 책을 읽어주는 내 목소리가 갈라지고, 반복해서 읽는 통에 나는 지루하기만 한데 아이는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을수록 더 책에 빠져드는 것 같다. 그리고 반복해서 책을 보다 어느 순간부터 질문을 퍼붓는다. “이 자리는 누가 앉는 자리예요?”(추피 선생님이 밥을 나눠주려고 일어났나 봐), “왜 박쥐는 우산을 쓰고 비옷을 입는데 개구리는 안 입어요?”(개구리는 비를 좋아해), “주주는 왜 친구가 온 걸 안 반가워해요?”(자기가 먹을 코코아가 줄어드니까) 내가 들려주는 대로 잠자코 듣고만 있던 아이가 어느새 컸다고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질문을 쏟는다.


모음 하나가 다르지만 발음이 거의 유사한 영어 단어 ‘wander(헤매다)’과 ‘wonder(놀라다)’이 있다. 다이앤 애커먼은 『새벽의 인문학』에서 두 단어를 언급하며 ‘낯익은 것을 제대로 보려면 새로운 눈이 필요하고, 일상에서 조금만 벗어나 헤매면 정말 놀라운 광경을 맞닥뜨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너무 지겹게 읽어서 뻔한 책인데, 아이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장면에서 헤매고 놀라고, 궁금증을 갖고 질문한다. 아이의 책 읽기에서 나의 두 가지 오만함을 바라보게 된다. 축약본을 읽었을 뿐인데 혹은 줄거리를 많이 들어서 이미 읽었다고 착각한 책이 너무도 많다는 것, 한번 각 잡고 읽었다고 대부분의 내용을 기억해야 하고 그로부터 얻은 교훈이나 감상을 잘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니스의 상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어? 교활한 샤일록이 복수하려다가 자기 발등 찍는 이야기잖아.’, 그러나 독서모임에서 읽어본 책은 어릴 때 내가 읽어본 어린이용 책과 달랐다. 형식도 그렇거니와 내용면에서 발견하게 되는 지점도 훨씬 넓고 다양했다. 여럿이 읽어 더 그랬다. 『읽다』를 두 번 읽어도 꽂힌 부분이 같다면 이전에 읽었던 시간은 무가치한 것인가? 김영하는 크레페, 내가 커피와 같이 먹는 걸 무척 좋아하는 크레페에 빗대 이렇게 말한다.


103.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은 것은 고유한 헤맴, 유일무이한 감정적 경험입니다. 이것은 교환이 불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얇은 세계가 우리 내면에 겹쳐집니다. 저는 인간의 내면이란 크레페 케이크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크레페 한 겹은 무척이나 얇지만 그 두께는 분명 존재한다. 나는 느린 학습자이자 느린 독서가지만 미미하게 층이 쌓여가다 보면 어느새 나만의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될 거라고 믿고 싶다. 확신은 할 수 없으므로 희망사항이다. 조선시대 김득신은 같은 책을 세다가 까먹을 만큼 반복해서 읽었다는데, 겨우 한 번 읽고 내게서 남아있는 게 없는 것 같다고 투덜댈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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