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메모
잠든 아이 곁에서 <아무튼, 메모>를 읽다가
아니 에르노의 <세월>을 읽다가 역설적인 첫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정혜윤의 <아무튼, 메모>에서 작가가 책을 읽다가 밑줄 그었다는 문장 중 나도 따라 그은 것들.
“꽃이 폈다. 바깥에 좋은 것 많다. 나가 놀아라. 네 생각 밖으로 나가 놀아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우리 인생에는 약간의 좋은 일과 많은 나쁜 일이 생긴다. 좋은 일은 그냥 그 자체로 놔둬라. 그리고 나쁜 일은 바꿔라. 더 나은 것으로. 이를 테면 시 같은 것으로.” <보르헤스의 말>
일곱 살 무렵에 필통을 선물 받았다. 그 속에 든 연필 세 자루와 지우개를 만졌다가, 필통을 다시 닫았다가 또 열어보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흑연과 고무 냄새를 킁킁 맡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연필을 들고 끼적였다면 아마도 내 최초의 메모였을 것 같지만 글자를 몰랐을 때였으니 메모를 남겼을 리는 만무하다. 중등학교를 다닐 때의 메모는 대부분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듣다가 교과서 끄트머리에 적어놓았던 것일 테다. 대학생 때는 그날 사 먹었던 간식, 반찬 재료, 학생식당 메뉴 가격 등을 꼼꼼히 기록해 그 달이 지나기 전에 잔고가 바닥나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20대 중반부터는 직장에서 메모를 자주 했다. 메신저나 전화를 받고 포스트잇에 갈겨쓴 급히 처리해야 할 업무부터, 달력에 작성된 중요한 일정, 그날 끝내야 할 일들을 적은 메모들. 한 가지씩 끝내 놓고 줄을 긋다가 퇴근 무렵 모든 줄이 사라져 있던 날엔 기분이 좋았다. 줄 그어진 메모지는 휴지통행이었다.
요즘 나는 아이에게 때맞춰 입을 수 있는 옷을 구대 카페에서 주문하기 위해, 평균에 미달하는 아이의 발달 영역을 공부하며 메모한다. 언어치료를 공부하는 지인에게(무려 육아휴직 중에 공부라니, 세상엔 부지런한 사람이 많다.) 아기의 언어발달검사를 받아본 결과 표현 언어가 백분위 하위 1이었다. 하위 10도 아닌 1이라니. 소아과에서 받은 영유아 검진상 인지발달에는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아기가 걷는 것부터 시작해 눈에 보이는 발달이 모두 또래보다 느리니 엄마인 나는 자주 초조해지고 불안해지기만 했다. 지금 내 곁의 메모지는 쌓여가기만 할 뿐, 버려지는 것들이 많지 않다. 어느 순간 걱정을 훌훌 털어버리며, 겹겹이 쌓인 메모지도 버릴 날이 오길.
<아무튼, 메모>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전쟁포로감시원의 이름이 적힌 메모지를 간직한 한 전범의 이야기였다. 일제가 일으킨 전쟁에서 포로에게 악랄한 역할을 도맡아야 했던 조선인 전쟁포로감시원들. 천황을 위시한 전쟁의 주도자들은 처벌을 제대로 받지 않았지만 조선인 전범 스물셋은 급히 재판받고 사형에 처해진다. 포로감시원 중 생존자 한 명은 동료들의 이름, 고향, 사형을 당한 날짜를 적은 종이를 아직 버리지 못했다. 역사가 전범이라고 이름 붙인 이들, 그들에게 전쟁의 종결은 승전도 패전도 아니었다. 내가 살아생전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전해 달라는 동료의 목소리를 아직도 잊지 못한 이의 이야기. 그 짧은 메모 하나로도 메모지 너머의 우리는 전쟁의 고통과 상흔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아니 에르노의 <세월>의 첫 문장은 역설적이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수 있지만 일생을 붙잡고 살아가는 장면들 역시 존재한다. 그 기억은 생의 고통을 잊게도 해주고, 고통을 줄곧 안겨주기도 한다. <아무튼, 메모>를 읽으며 나는 사람이 남기는 여러 메모들을 생각했다. 언젠가 휴지통에 버려질(버리고 싶은) 메모와 여전히 곁에 두고 꺼내어볼 메모를, 우리의/사람들의 메모와 개인의 메모를, 기록으로 남겨진 메모와 그렇지 않은 메모를. 나는 비극의 역사를 증언한 메모 앞에서 숙연해졌다가도 내 개인의 일을 기록한 메모를 더 자주 떠올릴 것 같다. 이를테면 내 몸에 새겨진 메모들을. 아기를 안았을 때 맞닿은 가슴 또는 내 어깨에 댄 아기 턱의 움직임, 양말을 신기다 발이 꽉 들어찬 것을 느낄 때, 손을 잡고 걸을 때마다 내 손에서 꿈틀대는 작고 따뜻한 손가락 같은 것들을. 혹은 유모차 가방에 넣어가는 한 손에 쥘 만한 작은 책들, 그러니까 아무튼 시리즈나 독립출판물들. 그 책들의 제목과 소제목, 아기가 금방 깨어나면 방금 읽었던 마지막 한 문장이 나에겐 그날그날의 메모가 된다. 그러니까 메모지에 써두지 않더라도 나는 오래 기억할 것 같은 메모, 아이는 기억하지 못할 메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