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누군가의 오늘은 살게한다.
어릴 때부터 우리 가족은 남들이 보기에 유난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애틋했다.
내 나이 10살 때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아빠는 우리 삼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셨어야 했다. 우리는 자연히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10살의 나와 8살이던 여동생, 고작 4살이던 막내까지. 유난히 개구쟁이였던 우리는 그렇게 할머니와 함께 11년을 살았다. 그 긴 시간 동안 할머니는 남부럽지 않게 우리를 키워 내셨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농사를 짓기 때문에 늘 바쁠 때도 오빠들을 할머니께서 키워 주셨다. 오빠들을 키워 놓고 이제 좀 쉬려나 할 때쯤 우리를 키우게 되시는 바람에, 할머니는 평생 동안 자식 키우고 또 그 자식의 자식을 키우며 사셨다.
우리가 함께 살기 전부터 할머니는 나를 ‘영’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에겐 저마다 이름이 있다. 그리고 그 이름에는 각자의 의미가 담겨 있다. 어렸을 적 친구들은 그 이름에 별명을 붙였고, 짧게 줄여 부르거나 비슷한 다른 말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내 이름은 하나였지만, 부르는 사람에 따라 수십 가지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이름을 가진 나는 가끔 너무 그리워진다. 그래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그 추억들을 꺼내본다.
초등학교 3학년때, 그러니까 내 나이 10살 때 부모님이 이혼을 했다는 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냥 나는 이제 엄마랑 살 수 없게 되었으니 할머니랑 살아야 하는구나. 그 정도로만 생각 했던 것 같다. 그 때를 떠올리면 막내고모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성인이 되고 고모와 이런 저런 얘기들을 다 나눌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고모는 내가 몰랐던 많은 나날들을 얘기해주곤 했다. 우리가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 고모는 치킨집을 운영하고 계셨다. 그 때 고작 4살이었던 막내가 할머니 손을 잡고 가게로 왔었다고 한다. 그 모습이 고모께는 두고두고 가슴 아픈 장면이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작고 어린 녀석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할머니 손을 꼬옥 잡고 아장 아장 걸어오던 모습이 아른거려 가슴이 시리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할머니가 우리를 어떻게 안고 살아내셨는지가 함께 떠오른다. 그 마음은 매일같이 차려지던 밥상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할머니는 단 한 번도 우리 끼니를 거르게 한 적이 없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1분이라도 더 잤으면 했던 아침잠이 많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하루도 아침을 먹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까. 그게 할머니는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함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아침은커녕 삼시 세끼를 하루라도 제대로 챙겨 먹은 적이 없는데 귀찮고, 번거롭고, 힘든 걸 묵묵히 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지켜주신 건 끼니만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껏 아이로 살 수 있는 하루들이었다.
지난 하루들을 떠올려보면 꼭 생각나는 일상이 있다. 우리 동네에는 넓은 공터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우리 삼남매의 아지트였다. 항상 할머니는 저녁때가 되면 우리를 찾으러 느티나무로 왔다. 그러곤 의자에 앉아 우리 셋이 노는 걸 보고 계셨다. 아마도 그게 우리 할머니의 소소한 행복이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렇게 할머니 양옆에 쪼르르 서서는 쉴 틈 없이 재잘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그 걸음은 우리의 행복이었다.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우리한테 얘기했었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 죽는 사람만 불쌍한 거라고. 6.25를 겪으신 할머니께 지금 세상은 너무 좋은 세상이었다. 먹고 싶은 거 먹고 가고 싶은 데 가는 신기한 세상이었다. 그런 할머니와 우리는 제대로 된 여행 한번 가지 못했다. 형편이 안 좋다는 건 핑계였다. 어린 우리는 친구들이랑 노는 게 제일 행복하고 즐거운 거였다. 아니, 사실은 우리 셋이 노는 걸 제일 좋아했다. 셋이 하는 고무줄놀이, 셋이 하는 술래잡기, 셋이 하는 숨바꼭질까지. 우리가 유난이다 싶을 만큼 돈독해진 건,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는 것일지 모른다.
동생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의젓한 누나이자 언니였다. 어쩌면 그 이상의 엄마 역할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나는 그저 엄살쟁이 어린애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우리 할머니는 의사였다. 체했을 때는 매실로 담근 약을 먹여주셨다. 배탈이 났을 때는 주름진 손으로 내 배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 손길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다래끼가 나서 눈도 제대로 못 뜰 때에는 종이에 물고기를 그리고 나를 똑바로 서게 한 다음, 종이를 내 얼굴 옆에 대고 그 물고기의 눈에 못을 박았다. 발목을 삐어서 퉁퉁 부은 날에는 얼린 약초로 내 발목을 문질러 주셨다. 내가 처음으로 수술이란 걸 했을 때 우리 할머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밤새 나를 쓰다듬어 주셨다. 시간이 약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할머니의 정성 덕인지 그렇게 온갖 민간요법을 거치면 나는 씻은 듯이 낫곤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를 그만큼 걱정해주고 진심으로 내가 낫기만을 바라는 그 마음이, 내 생에 최고의 약이었던 것 같다.
그 사랑과 약을 받아먹으며 나는 어느덧 중학생이 되었다. 그 무렵부터 우리 집의 하루에는 사람만큼이나 많은 생명들이 함께 얹혀 살기 시작했다.
학교 마치고 늘 가는 길을 걷고 있었다. 어디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노란무늬에 고양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동물을 너무너무 좋아했던 나는 그 녀석에게 정신이 팔려 한참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가 집으로 향하는데 그 녀석은 내 뒤를 쫄래 쫄래 따라왔다. 강아지도 아니고 고양이가 사람을 따라오다니, 그것도 처음 본 사람을 말이다. 설마 집까지 따라 오겠냐고 생각하며 횡단보도를 건널때도 그 녀석은 내가 산책을 시키는 우리 집 냥이처럼 자연스럽게 내 옆에 착 붙어서 걸어왔다. 걷다보니 집골목까지 와버렸다. 대문 앞에서 쓰다듬으며 알아 듣지도 못하는 녀석에게 협박을 했다.
“우리 집에 오리도 있고 토끼도 있고 닭도 있고 강아지도 있다. 니 있을 자리 음따. 할머니 알면 내 파리채로 얻어맞는다. 얼른 가라~ 훠이훠이.”
그랬다.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 집은 이미 동물농장이었다. 강아지한테는 짬밥을 주려고, 닭은 달걀을 낳으니까, 오리도 오리 알을 낳고, 토끼는 편찮으신 고모부 약하려고 키우는 것들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동물을 좋아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 집 마당은 이미 포화 상태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녀석을 두고 집에 들어갔다.
다음날, 녀석은 우리 집 마당을 활보 하고 있었다. 누가 데리고 왔냐며 타박하기 바쁘던 할머니의 절친이 되었다. 이상하게 녀석은 마치 우리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처럼 지냈다. 할머니께서 마을 회관에 갈 때도 따라가고, 심지어 집에서 15분은 걸어야 하는 시장에 갈 때마저 할머니를 따라갔다. 어느새 할머니가 끌고 다니시던 유모차 아래 자리는 그 녀석 전용 자리가 되었다. 좋은 집을 줘도 항상 그 곳에서만 잠을 자는 녀석을 보고 할머니는 방석과 담요를 깔아 아예 자리를 내어주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녀석에게 지나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녀석은 어딜 가든 할머니 껌딱지였다.
우리보다도 할머니를 더 따르던 녀석은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1년쯤 되던 날 홀연히 사라졌었다. 항상 혼자 알아서 산책을 다니던 녀석이었기에 이번 산책은 길어지는구나, 했었던 우리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집에 오는 길에 지나를 봤다고, 그래서 우리는 왜 안 데려 왔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지나가 할머니 따라 갔더라고 했다. 할머니께서 시간이 날 때마다 가셔서 콩도 키우고, 상추도 키우던 지금은 아무도 가지 않아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그 풀밭 에서 마치 잠이 든 듯이 그렇게 죽어 있었다고. 아마도 그 녀석은 할머니를 따라 간 것 같다. 어딜 가든 함께였던 할머니를 따라 하늘나라 까지 가버린 것 같다. 지금도 하늘에서 마저 지나는 할머니와 함께 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지나가 할머니를 그렇게 따랐던 이유는 너무 분명했다. 할머니는 언제나 약한 것들 곁에 가장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었으니까.
할머니는 동물을 좋아하셨다. 굳이 직접 말씀하시진 않으셨지만 내 기억엔 그랬던 것 같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키우던 녀석들의 먹이를 챙기셨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큰 사랑인지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우리 집 강아지 부부였던 아씽이랑 아찌도 자주 쓰다듬어 주셨다. 할머니 껌딱지였던 지나는 할머니를 너무 좋아해서 우리 집 문 앞에 죽은 쥐를 선물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왜 여기다 놔두냐고 화를 내시면서도 쥐가 있는 날엔 지나에게 생선을 주셨다.
아찌가 새끼를 낳던 날 할머니는 아찌 새끼가 다리사이에 끼어서 나오지 못하고 죽어갈 때 직접 인공호흡을 해서 살리셨다. 우리는 피 범벅이 된 게 무섭고 끔찍해서 손도 대지 못했는데 할머니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입을 맞대셨다. 그리곤 녀석이 힘겨운 숨을 뱉어 낼 때 정말 행복해 하셨다. 할머니는 새끼를 낳은 녀석에게 칭찬 한 번 하지 않으셨다. 먹여 살리기 힘든데 새끼는 또 왜 이렇게 많이 낳았냐며 구박을 하셨다. 말은 퉁명스럽게 하셨어도 아찌를 위해 가마솥에 미역국을 끓이신 할머니 덕에 아찌가 새끼를 낳은 다음 날부터 무려 일주일 동안 우리는 미역국만 먹었다.
할머니의 손길이 하루하루 쌓여서, 할머니의 평범한 하루가 되었다. 그 하루는 늘 같은 모양으로 흘러갔다.
할머니의 하루는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 항상 똑같았던 것 같다. 아침을 먹고 비글 같은 삼남매는 학교에 간다. 그럼 할머니는 혼자 그 많은 것들을 정리하고, 빨래를 한다. 그러곤 항상 마을회관으로 가셨다. 거기에 모여 할머니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마칠 쯤에 돌아와 미리 저녁을 준비해 두셨다. 그럼 우리는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러곤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수다쟁이들처럼 떠들었다. 할머니는 우리 얘기를 들으며 웃었다. 그게 눈물 나게 그립다. 어디 좋은 곳에 가지 않아도,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남들처럼 너무 평범한.. 너무 당연한 그 일상이 눈물 나게 그립다. 그 때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웃음을 딱 한 번만 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