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기쁨이 슬픔에게
"내가 쟤는 빼자고 했잖소!"
"뭐라 했소, 쟤? 너 몇 살이니?"
오늘도 노자와 희자가 싸우고 있었다.
늘 그렇듯, 노자는 모든 것이 못마땅했다.
"반성하는 날 쟤를 부르면 어쩌자는 거요?"
"반성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 아니오! 매일 죽상을 하고 있으면 좋겠소?"
죽상을 하고 있던 노자와 애자가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반성이라기보다 본체의 감정을 점검하는 날이오."
낙자가 박수를 짝! 쳤다.
"겨울도 깊어졌고, 새해도 벌써 한 달이 다 갔잖소. 다짐, 용기 이런 걸 돌아보기 좋지."
"다짐 같은 거 없는 자요."
"그렇소. 용기, 희망, 그런 단어만 나오면 몸살 나는 자요." 드물게 노자와 낙자까지 동조하고 나섰다.
"아니. 이 자도 사실 생각이라는 걸 하오." 침울한 애자의 목소리에 모두 놀라움과 불신을 표했다.
"입 함부로 놀리지 마시오!"
"오늘 낮에 제일 신경 써서 한 일이 계란 삶기요!"
애자는 눈썹 끝을 늘어뜨렸다.
"좀 전에 열심히 쓴 글을 내가 봤소."
"오? 아까 뚱땅뚱땅 쓰던 거? 웬일이니." 희자가 반색하며 노자의 등을 찰싹찰싹 쳤다.
"어디 봅시다. 또 아무 말이나 쓴 건 아닌지..."
애자가 말없이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푸른빛이 나는 두루마리가 도르르 굴러 나와 모두 앞에 풀썩 펼쳐졌다.
나는 대체로 겁이 없는 편이다. 공포 영화와 소설, 스릴러를 좋아한다.
학창 시절에는 얌전한 아이로 보였는지 발라드 씨디등을 선물로 받았다.
자리에 앉아 조용히 미친 생각을 하고 있으면 누군가 그런 걸 슬쩍 내밀었다.
그러면 말없이 엄지와 검지를 구부려 알까기 하듯 튕겨냈다.
"미쳤나 봐." 내 주변 친구들은 그런 반응을 좋아했고, 나중에는 그냥 와서 다 시비만 걸었다.
대학교 와서는 내내 지겹도록 영어와 교육학 공부만 했다.
그 많은 영어 원서를 어떻게 다 봤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임용고사 1차만 붙기를 몇 해. 3년 차에 나는 완전히 너덜너덜해졌다.
더는 공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번 아니라고 생각하자, 탁- 손에서 놓아졌다.
서른 가까이 살았던 경상도를 떠나, 어느 날 대충 짐만 싸서 경기도로 올라왔다.
경력이라고는 대학교에서 두 달 토익을 가르친 게 전부였는데, 바로 어학원에 팀장으로 취업이 됐다.
"니는 겁도 없나?" 아빠는 내심 서운한 목소리로 물으셨다.
겁이 왜 나겠는가. 안 되는 걸 붙잡고 있는 내 미래가 더 무서웠다.
"왜 사투리 안 쓰세요?" 수상할 정도로 표준어도 빠르게 배웠다.
"아이, 요새 누가↗ 사투리↗ 써↘요"
고향 억양으로 대답하면, 사람들은 또 그렇게 좋아했다.
그리고 퇴근해서 집에 오면 매일 울었다.
불이 꺼진 원룸에 돌아오면 그제야 혼자일 수 있었다.
"엄↗마↘" 혼잣말을 하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동네 앞 마트도 낯설었고, 내 주변에는 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서른 살이 되도록 나는 사회에서 배운 게 없었다.
그래도 낮에는 꿋꿋했다. 일을 하고, 혼자 장을 보고, 부동산도 찾아다녔다.
눈물이 나면 쓱 닦고, 방도 닦고 잠들었다.
짐가방 몇 개로 채웠던 원룸은 새벽이 되면 유난히 조용했다.
내가 책임져야 할 공간의 무게가 한눈에 들어왔다.
'내일은 재래시장에 가봐야지.' 점점 적막을 친구 삼는 법을 배워갔다.
몇 달 뒤 경기도교육청 영어회화전문강사 시험에 합격했다.
고등학교로 첫 발령이 났지만 4년 단위로 재계약을 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6년을 일하고 결국 초등학교로 옮겼다.
여전히 매년 재계약이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다시 시험을 볼까, 고민을 했다. 나는 희한하게 시험을 잘 본다.
기억력도 암기력도 별로 안 좋은데, 그냥 마음을 다 쓸 줄은 알았다.
당시 MBC, 해커스, 농협 1차까지는 모두 통과했다. 그래서 더 헷갈렸다.
지금부터 해도 몇 년 안에 붙기는 할 것 같았다.
"지금부터 해도 정년 퇴임 얼마 안 남은 거 같은데."
남편이 용기를 줬다.
그만 둘 용기.
가끔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을 때가 있다. 공부를 안 하고 있으면 불안하다.
'이렇게 한가하고 신나게 살아도 되나?'
습관적으로 내 행복을 검열한다.
청춘의 모든 시간을 하나를 위해 쏟아부었지만 손에 남은 성취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행복하다.
왜냐면 나는 나를 다 소진할 만큼 용감했고,
그 시간이 빠져나간 자리를 그대로 둘 만큼 겁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 써버려 남은 마음들이 모였다.
나는 지난날의 나를 불러 모아 이 모임을 만들었다.
용기 없는 자들은 서로를 안아준다.
행복해도 겁낼 필요 없다고 말해준다.
책 한 권과 차 한 잔. 글을 쓰는 하루면 괜찮다는 걸 우리는 안다.
우리는 더 이상 용기를 증명하지 않는다.
행복을 선택한 사람에게 왜 설명이 필요한지 모른다.
용기 없는 자들의 모임은 그렇게 조용히 커져 간다.
"흠흠... 생각을 하긴 한 모양이오."
낙자의 말에 애자는 다시 두루마리를 잘 말았다.
"우리도 서로 한 번씩 안아 줍시다!"
희자가 당장이라도 끌어안을 것처럼 팔을 벌렸다.
"자, 그럼 글을 읽었으니 이것으로 정리합시다."
"그럽시다. 이 자도 내일 좋은 기분으로 일어나면 좋겠소."
모두 멀찌감치 떨어지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 다들 어디 가시오? 나 삐진다?"
"그러게 내가 얘는 빼자고 했잖소!"
질색을 하며 노자가 투덜투덜 멀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슬쩍 돌아와 걸음을 맞췄다.
기쁨은 슬픔을 몰아내지 않았다. 다만 옆에서 걸었다.
둘은 옥신각신 서로 등을 때리듯 두드리며, 그렇게 본체의 마음속으로 사라졌다.
푸른 두루마리가 펼쳐진 듯, 기분이 가벼워질 아침을 본체는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