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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우 Oct 20. 2023

손가락

“9800원입니다.”


 키오스크의 음성이 말한다. 반지가 끼워진 새끼손가락을 단말기에 넣는다. 푸른빛과 함께 반지가 스캔되자 결제가 완료되었다는 알림 창이 떠오른다. 구매한 커피를 깐 후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카운터로 향한다. 그곳엔 고등학교 남학생 두 명이 컵라면 한 입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야! 아 진짜 한 입만! 어?”

 “니 돈으로 사 먹어 임마.”

 “하나 다 먹기에는 배불러. 대신 한 입 주면 내일은 내가 컵라면 사줄게. 어?”

 “너 진짜지? 손가락 걸어 그럼.”


 그러고서 두 학생은 킬킬대며 익숙하게 새끼손가락을 건다. 한때 유치원 아이들이 서로 순수하게 약속을 하던 것처럼. 두 학생이 손가락을 걸면서 서로의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가 맞닿는다. 맞닿은 두 반지는 푸른색으로 미세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지금 한 입 주면 내일 중으로 컵라면 하나 사줄게. 안 지키면… 오천 원?”

 “만 원.”

 “야 컵라면 하나 가지고 무슨-”

 “만 원.”

 “…에효 그래 만 원 하자. 하나 사주면 되지 뭐.”


 남학생이 말을 마치자 반지의 푸른빛이 사그라들며 학생의 핸드폰에 알람이 울린다. 쓰레기통에 빨대 껍질을 밀어 넣으며 학생의 핸드폰 화면을 슬쩍 훔쳐본다.


[약속지켜] 앱 알림

새로운 약속 성사! 9월 13일 중으로 정현규 님께 컵라면을 사주세요.

(약속을 어길 시 -10000원)

*약속에 걸 수 있는 최대 금액은 만원입니다.


 알림을 확인한 후 뒤돌아 편의점을 나가면서 작게 미소를 짓는다. “아싸 내일 너 피해 다녀야지” “야 그러면 진짜 죽는다!”하면서 티격대는 남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한 것들은 여전하다.


 커피를 빨면서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나도 한때는 라면 한 입으로 킬킬댈 수 있었던 것 같은데, 나이를 먹은 건지 사람이 변한 건지는 몰라도 언제부턴가 다 재미없다. 커피는 하나도 쓰지 않고, 단풍은 하나도 예쁘지 않고, 가을 공기는 하나도 시원하지 않다. 이별 후유증이라고 하기에는 너랑 헤어진 지도 벌써 1년이 되어간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내 문제인 거다. 뭐가 문제인지는 몰라도.


 기둥에 기대어 버스를 기다리는데 핸드폰에 익숙한 알람이 울린다.


[약속지켜] 앱 알림

곧 종료되는 약속이 있어요!

김진수 님이 9월 12일 오후 5시 18분에 ‘엄청나게 큰 꽃다발’을 사주기로 약속했어요.

(상대방이 약속을 어길 시 +10000원)


 헛웃음을 지으며 알람을 지워버린다. 안 그래도 일주일 전부터 계속 시끄럽게 울려대던 알람이다. 짜증이 나서 확 알람을 꺼버리려다가 말았다. 어쨌든 오늘이 지나면 울릴 일도 없을 테니까. 그래도 마지막인 김에 앱을 열어 쌓여있는 지난 약속창들을 훑어본다.


- 김진수 님이 12월 25일에 레몬청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상대방이 약속을 어겨 +10000원)

- 김진수 님이 1월 1일에 함께 바다를 가기로 약속했어요. (상대방이 약속을 어겨 +10000원)

- 김진수 님이 3월 6일에 초록색 생일 케이크를 사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상대방이 약속을 어겨 +10000원)

- 김진수 님이 4월 18일 오후 3시까지 제주도에 한 번 더 가기로 약속했어요. (상대방이 약속을 어겨 +10000원)

……


 떠오르는 화면창들을 넘기다가 핸드폰을 덮으며 버스에 오른다. 헤어지기 전 너가 나에게 했던, 이제는 의미가 없어진 약속들이다. 우리의 관계는 이미 무효가 된 지 오래인데, 그걸 알 리가 없는 어플에서는 그 약속들이 아직도 유효한 모양이다. 덕분에 어플로 나한테 들어온 돈만 벌써 9만 원이다. 그러게 툭하면 손가락 거는 것 좀 그만하라니까.

 너는 ‘1년 후에도’라는 말을 좋아했다. 1년 후에도 내가 크리스마스에 레몬청 만들어줄게. 1년 후에도 너랑 새해에 바다 보러 갈게. 1년 지나기 전에 너랑 같이 제주도 또 올게.

 꽃다발 약속도 딱 그렇게 생겨버린 약속이었다. 너가 대뜸 사다준 연둣빛 꽃다발에 나는 무방비하게 감동받았고, 신이 난 너는 1년 후에도 또 꽃다발을 사다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때가 되면 날짜를 기억하지도 못할 거라고 내가 말하자, 너는 그럼 날짜에 시간까지 박제해 두자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선포하듯 약속했다. 딱 1년 후에도 이 날짜 이 시간에 윤지연한테 엄청나게 큰 꽃다발을 사주겠습니다-라고. 너나 나나 참 멍청했지. 날짜를 기억할 수 있을지 걱정할 게 아니라, 우리가 그때까지도 사귀고 있을지를 먼저 걱정했어야 하는 건데.


 약속이 하나씩 종료될 때마다 둘 모두에게 알림이 올 테지만, 우리는 그 문제로 서로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하고 또 말을 섞을 바에는 몇만 원쯤 잃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그래도 오늘까지인 꽃다발 약속이 끝나면 더 이상 남은 약속이 없었다. 무효한 약속들로 돈을 받는 건 나도 싫다. 오늘이 지나면 그동안 모인 10만 원을 네 계좌로 보내고 전부 털어버릴 거다. 이제는 갑자기 울린 알림에서 네 이름을 볼 일도 없을 거고, 원치 않게 과거를 떠올리게 되는 일도 없을 거다. 유효했던 것도 무효한 것도 전부 지우고 너를 청산할 거다.

 마침 약속이 마감되었음을 전하는 알림이 울린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켠다.


[약속지켜] 앱 알림

김진수 님이 약속을 지켰다고 알림을 보냈어요!

정말 약속이 지켜졌다면 5분 내에 [약속을 지켰어요] 버튼을 눌러주세요.

(약속 성사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면 해당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핸드폰 화면에서 잠시 눈을 떼지 못한다. 앱에서 오류가 난 것은 아닐까 잠시 고민한다. 마침 버스가 집 앞 정류장에서 멈춰 선다. 홀린 듯 버스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빠르게 걷기 시작한다. 뛰기 시작한다.

 나는 집 건물 앞에서 마침내 멈춰 선다. 익숙한 실루엣의 누군가가 익숙한 연둣빛 꽃다발을 들고 서 있다. 또 원치 않게 과거의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언젠가 우리가 장을 보러 갔을 때였다. 나는 커다란 배추를 한가득 안으며 꽃다발이라며 장난을 쳤고, 너는 며칠 후 정말 배추 같은 색감의 꽃다발을 내게 안겨줬었다. 꽃 아니고 배추라는 뻘소리를 하면서.

 1년이 지나 너는 또 같은 색의 꽃다발을 들고 헤어진 사람을 찾아왔다. 이번에는 또 무슨 뻘소리를 하려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서 겨우 네 앞에 선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지만 할 말을 찾지는 못한다. 할 말이 없어서인지, 너무 많아서인지는 몰라도.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연다.


“만 원 아까웠나 봐.”

“…요즘 꽃값 비싸.”

“뭐?”

“이거. 꽃다발. 만원보다는 비싸다고. 그니까.. 돈 때문에 온 거 아니라고.”

 “그럼? 그럼 왜 왔는데? 그동안은 내내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왜 나타나? 가만히 있었어도 내가 알아서 돈 돌려주려고 했-”

“이번이 진짜 마지막인 것 같아서.”

“…”


 내가 하고 있던 생각을 너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잠시 놀란다. 벙쪄 있는 나를 보던 너는 내 핸드폰을 향해 살며시 고갯짓을 한다.


 “나 약속 지켰는데. 5분 지나면 아예 무효 처리 돼.”


 홀린 듯 핸드폰을 켜서 어플의 버튼을 누른다. 약속이 지켜졌다는 알람이 울리면서 너와 나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푸르게 빛나며 진동한다. 같은 순간 같은 촉감을 느끼며 서로와 눈을 맞춘다. 무효했던 약속이, 유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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