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도 못하네
내가 요리를 배우면서도
절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매일 세끼 밥상차리기다
방학 때 한 번 애들 데리고 요리교실에 갔다 온 적이 있다.
그 뒤로 준영이가 나한테 엄마 요즘에 왜 이렇게 고은이 같으냐 말한다.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했더니 요리 배우러 다니다가 왜 금세 그만뒀어? (고은이는 뭐든 금방 잘 그만두는 경향이 있다)
엄마는 너희 스케줄 비는 시간에 움직일 수 있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고 있는 거라 얘기해 준다.
아이들 시간에 맞춰사는 나지만 지난달에는 목이 조이는
듯이 하루하루가 답답했었다. 배운 요리를 써먹어 밥상을 차리는 재미도 잠시 느껴봤지만 고등어구이를 실패하고서는 그 재미도 하루아침 사라졌다. 아이들을 위해 배우는 요리 아이들 시간에 맞춰 사는 일상. 하루는 저녁을 다 차리고 숨을 크게 쉬어보았다.
최근에 읽은 책 [미움받을 용기] 내용이 요 며칠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인과관계에 의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목적에 의거하여 나온다고 책에서 이야기한다. 무슨 말인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묘하게 설득당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방 안에 갇혀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20대 청년이 있다. 이 청년이 방에 갇혀 지내며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 청년의 친구는 유아기시절 이 청년의 부모의 방치 또는 부모의 과보호 또는 정신적인 큰 충격 때문에 이런 갇힌 삶을 살게 되었다고 믿고 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이 아닐까라도 말이다. 하지만 책에서는 그 친구의 인과관계적 사고를 아주 차분하면서도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으며 우울함을 느끼는 그 청년은 우울함이라는 감정을 꺼내놓기 위해 스스로를 방에 가둔 것이라고. 목적에 의해 스스로 방에서 나오지 않게 된 것이라고. 만약 인과관계에 따르면 부모의 방치 또는 과보호를 또는 정신적으로 큰 사건이 있었던 모든 아이들이 다 방에서 한 발짝도 나와야 하지 않아야 되는 게 아니냐고 반박한다. 이 청년은 방에 스스로를 가둠으로써 다른 세상밖에 마주할 것들을 피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었다. 예를 들면 방 밖을 벗어나면 평범한 사람들에 속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갇혀있을 때 보다 덜 특별한 사람이 되며 부모님들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덜 받게 된다. 는 사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방에 갇혀 있는 것이 그 청년에게는 더 편하고 더 안전하다고 느낀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행동을 타당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인 우울함을 목적에 의거해 가지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미움받을 용기] 책에는 이 20대 청년의 예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감정들을 똑같은 방식 ‘목적에 의한 감정일 뿐이다’라고 조목조목 설득시킨다. 회사에서 상사에게 느끼는 감정,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얼굴이 달아오르는 감정 등.
잠깐 책을 멈추고 내 감정도 목적에 의거한 방식으로 발상을 해보았다. 내 삶은 내 삶 없이 아이들을 케어하는 일상에 지루해하며 우울함도 느끼고 있다. 이러한 갑갑한 감정의 원인은 이것이라고 스스로 못 박듯 확신하고 있다. 1. 학창 시절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못해 원하는 대학에 떨어져 내 인생이 이렇다고 생각했고 2.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인 육아에 비협조적인 친정엄마와 남편이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움받을 용기] 책에 적용해서 생각한다면 나는 용기가 없는 것일 뿐 이러한 원인은 말도 안 된다는 결론이다. 내 갑갑함은 내가 마주할 용기가 없어 내 목적에 맞춤감정으로 가지고 온 희생량일 것이다. 그래 여기까지 적용이 되는 듯싶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마주할 용기가 없으며 ,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목적이 있을 거란 말인데 그게 무엇일까.
내가 배우러 다니는 요리도 좀 더 나은 살림을 위해 배운다. 요리를 배우는 사람이지만 요리 배우는 것도 재미있지 않다. 사실 배워도 잘 써먹지를 못한다. 실패한 고등어구이 위로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다. “왜 엄마는 고등어도 못 굽는 걸까” 그랬더니 아들이 이야기한다. “엄마. 괜찮아요. 그래도 갈치는 맛있게 잘 굽잖아요. ” 아니에요 고등어 맛있어요. 란 답변을 예상했지만 이 말도 썩 위로가 되었다.
미루어 보건대 나는 공부를 다시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더라도 공부를 열심히는 했지 잘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과 마주할 용기가 없는 것 같다. 친정엄마와 남편이 아이들 육아에 협조해 줘 일할 수 있는 현실이 되어도 사회생활을 잘할 거라는 사실과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일하고 싶은데 일하러 갈 수가 없다며 출근해서 어려운 사회생활보다는 편안한 사람들인 내 아이들과 내가 오너인 내 집에서 편하게 일하고 싶은 목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