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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랑 Mar 19. 2019

그래도 남겨진 여운에 달이 참 아름답네요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을 보고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을 보기 시작한 건 ‘경단녀’를 현실적으로 다뤘기 때문이었다. 주인공 강단이는 남편과 이혼하고 양육비도, 잘 곳도 없이 유학 간 아이를 뒷바라지해야 했다. 경력이 단절되기 전에 쌓아둔 내로라하는 스펙에도 불구하고 7년 간 일을 쉬었다는 이유로 1년 동안 구직활동에 실패한다. 결국 우수한 학벌과 화려한 스펙을 지원서에 기재하지 않고 고졸 계약직으로 ‘겨루’라는 출판사에 취직한다. 취준생들이 그렇게 쌓으려고 노력하는 ‘스펙’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놀기만’했다는 이유로 스펙을 포기해야 가까스로 비정규직이 될 수 있던 것은 아프게도 현실이었다. 경단녀가 남자 잘 만나서 취직되는 이야기, 혹은 이혼녀임에도 불구하고 부잣집에 시집가는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는 스토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한국 드라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름 새로운 시도를 한 이 드라마도 틀에 짜인 해피엔딩을 추구한다. 등장인물 중 비중 있는 모든 남자와 여자는 애초에 하나로 묶어져 태어난 것 마냥 마지막 회에서 서로의 짝을 찾는다. 스토리 상 필요한 로맨스라기보다는 로맨스를 위해 스토리를 만든 작위적인 연출이 불편했다. 성공한 남성에게는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지만 성공한 여성 이사는 회사에서 ‘마녀’로 불리는 이야기도 나왔다. 현실이 그렇기에 어쩌면 현실을 반영했을 거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일명 ‘일만 사랑’하던 여성 이사가 사실은 결혼과 출산을 못한 것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내용이 전개된다. 이는 비혼 여성을 결혼 ‘못’한 불쌍한 여성으로 매도하는 느낌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회에서 대표와 사랑을 시작하며 비로소 얼굴에 미소를 띠는 장면도 나온다. 능력, 재력이 완벽한 여자가 결혼은 못하는 악녀로 묘사되던 과거의 드라마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사랑을 해야 비로소 순도 100%의 여성이 되는 것처럼 전개된다.


주인공의 스토리도 고정된 성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남자 주인공인 차은호는 여자 주인공인 강단이에게 힘을 써 바닥에 눕히며 ‘나도 남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강단이는 그 모습에 설렌다. 이 장면은 ‘힘이 세면 남자답다’는 잘못된 공식을 재생산했고, 데이트 폭력으로 3일에 1명의 여성이 남성에게 맞거나 죽는 현실을 외면한 채 남성이 힘을 쓰는 장면을 로맨틱하게 그려냈다. 게다가 두 주인공이 사귀기 전, 갈팡질팡하는 강단이에게 차은호가 키스를 하는 장면은 드라마에서나 로맨틱이지 현실에서는 고소를 당해도 할 말 없는 성희롱이었다. 아직도 이런 장면들이 ‘로맨틱’이라는 단어 아래 용인되고 있으니 한국 드라마는 갈 길이 멀었다.


그럼에도 기억하고 싶은 말


비판할 부분도 있었으나 드라마가 책을 매개로 던지는 메시지가 참 따뜻한 것도 사실이다. 불편했던 장면보다는 따뜻한 느낌으로 이 드라마를 기억하고 싶은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나한테 책은 공산품의 일종으로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찍어낸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e-book보다는 종이책이 정겹지만 종이책에도 애정이 담겼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로맨스는 별책부록’을 보다 생각이 바뀌었다. 못 쓰겠다는 작가를 몇 년간 다독이고 그 마음을 이해하며 책을 만드는 모습, 나이 지긋한 작가의 자필 원고를 전달할 때 직원 모두가 환영하는 장면, 작가 소개에 단어 오류가 났지만 어떻게 만든 책인데 오천 부를 그냥 파기할 수는 없다고 울며불며 결국 스티커로 수정하는 모습. 누군가는 책을 팔아야 회사가 운영이 되니까 그런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절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로맨스는 별책부록’의 불편한 여러 가지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느낌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은 몇몇 대사 때문이기도 하다. 나쓰메 소세키라는 일본 소설가가 I love you를 ‘달이 참 아름답네요.’로 번역했다는 이야기로 만들어진 에피소드가 나온다. 차은호와 강단이가 함께 달을 보던 날, 차은호는 강단이에게 ‘달이 참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날 밤, 차은호는 SNS에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달이 참 아름답네요’라고 말했던 나쓰메 소세키가 생각나는 밤이었습니다.”라는 멘션을 달고 달 사진을 올린다. 사랑합니다, 몇 번이고 들어도 좋을 말이지만 소설가인 나쓰메 소세키의 일화를 이용해 만든 이 대사는 따뜻하고도 부드러운, 기억에 아주 오래 남을 말이었다.

차은호가 SNS에 올린 말 / 출처: tvN




차은호의 스승인 강병준 작가가 알츠하이머로 세상을 떠나기 전, 제자에게 남긴 유서도 마찬가지다.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없어도 한 사람의 마음에 다정한 자국 정도는 남길 수 있지 않겠니? 네가 힘들 때 책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었듯이, 내가 은호 너란 책을 만나 생의 막바지에 가장 따뜻한 위로를 받았듯이. 그러니 은호야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한 권의 책이 되는 인생을 살아라.

‘다정한 자국’이라는 말이 마음 깊숙이 베어 들었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인물에게 자연스럽게 동화되고는 하니 아들 같은 제자에게 남긴 말이 나에게도 와 닿았다. 배경음악과 어우러진 내레이션에 듣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도 이 대사 때문이었다. 마지막 회를 보다 말고 저 대사를 들은 여운을 남기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외로울 때면, 행복할 때면, 아니 그 어떤 때에도 생각나는 책이 되고 싶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허무맹랑한 망상보다는 한 사람의 마음에 다정한 자국을 남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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