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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랑 Feb 27. 2019

갇힌 곳(stereotype)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영화 '룸'을 보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룸’은 성폭행당한 여성의 삶을 소재로 한다. 성폭행, 아동 학대 등의 범죄를 주제로 한 영화가 많지만 대부분은 가해자의 시선을 담고 있으며 피해자가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이 꼭 연출된다. 그러나 영화 ‘룸’에는 그런 장면이 없다. 같은 공간에 있는 아이의 시선을 통해 사건의 잔인함을 덜고 가해자가 성폭행하는 상황보다는 생존자의 삶에 주목한다. 성폭행 생존자의 삶을 무기력하게 그리지도 않고 엄마이기에 희생해야 하는 경우도 없다. 오히려 엄마와 아들이 함께 치열하게 싸우고 부딪히고 그러다 좌절하고 연대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조이는 한 남자를 도우려다 납치되어 7년 간 단칸방에 갇혀 성폭행을 당한다. 잭이라는 아이를 낳고 둘은 나름의 규칙을 정해 살아가지만 조이는 더 이상 이 방 안에서만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평생을 룸에서 산 잭은 조이의 생각에 “NO!!!”를 외친다. 결국 잭은 반신반의하는 상태에서 조이의 계획에 동참하게 된다. 잭이 죽은 척을 해서 둘은 룸에서 탈출하고 조이를 감금 및 성폭행한 범인도 잡힌다. 이렇게 영화의 절반이 끝나고 탈출한 후의 삶으로 이어진다. 탈출만 하면 모든 게 좋을 것 같았던 예상과는 달리 힘든 싸움이 계속된다. 언론의 무례한 관심, 감금당하기 전 사진을 보자 치밀어 오르는 억울함, 강간범의 아들이라고 생각해 딸의 아들을 외면하는 조이의 아버지. 영화는 이러한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상태에서 끝을 맺지만 ‘모두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동화 같은 결말은 아니었다.


탈출에 성공한 후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던 조이는 결국 쓰러져 잠시 잭과 떨어져 지낸다. 그때 잭은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조이에게 보낸다, 엄마에게는 지금 힘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이 모습은 마치 탈출을 할 때 잭이 무서워하자 자신의 빠진 충치를 잭에게 준 조이의 모습과 겹친다. 둘은 서로의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난 좋은 엄마가 아닌가 봐”
“그래도 엄마잖아!”


잠시 다른 곳에 있던 조이가 집으로 돌아와 잭과 나눈 대화다. 잭에게 일종의 죄책감과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던 조이의 말에 잭은 아무렇지 않게 “그래도 엄마”라고 답한다. 그 말에 조이는 웃음과 울음을 함께 터뜨린다. ‘룸’을 보다 보면 영화 ‘미쓰백’이 떠오른다. ‘미쓰백’에서도 비슷한 상처를 가진 어른과 아이가 서로를 서툴지만 먹먹하고도 따뜻하게 위로한다.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서로에게서 위로와 안심을 얻는다. 성인 여성의 모성애를 강조하지 않고도 인간과 인간으로서 두 사람이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룸’도 마찬가지다. ‘룸’에 다시 가보고 싶어 하는 잭의 천진난만한 모습도 나타나지만 영화는 잭을 그런 아이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조이를 마냥 모성애 가득한 엄마로, 잭을 마냥 철없는 어린아이로 묘사하지 않고 서로를 위로하고 지탱해주는 존재로 그린다.


‘룸’은 확실한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영화가 현실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탈출하자마자 겪었던 아픔이 조이와 잭에게 앞으로도 문득 찾아올 거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바뀌어 버린 삶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고, 잭이 강간범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참담하게 끝나지 않는다. 잭이 ‘룸’에 다시 가고 싶다고 하자 조이는 잭과 함께 ‘룸’에 간다. 잭은 ‘룸’에 있는 화분, 의자, 옷장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조이에게 “엄마도 인사해야지.”라고 말한다. 무미건조한 잭의 말은 왠지 모르게 가슴 깊숙이 박힌다. 그 말이 조이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 둘이 함께 ‘룸’에서 나와 걸어가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룸’은 성폭행 생존자의 터무니없이 희망적인 삶을 그리지도, 한없이 우울한 삶을 그리지도 않았다. 딱 위로와 연대의 모습을 전달하는 것, 거기까지다.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 영화의 역할이 딱 적당하다. 대부분의 이야기에는 제작자의 욕망과 감정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이 영화에는 ‘만들어진 여성’에 대한 욕망이 없다. 제12회 여성 인권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내일, 또 내일, 그리고 또 내일’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어떤 여성도 맞거나, 죽거나, 결국 미치거나 하지 않는 장면은 없을까요?”


영화 속에서 많은 여성들은 맞거나 죽거나 미친다. 하지만 성폭행을 소재로 한 이 영화에서는 여성이 맞거나 죽거나 미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 성폭행을 당했으면 ‘피해자답게’ 우울해야 한다는 만들어진 생존자의 모습과 달리 조이는 조금 힘들어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다소 무덤덤한 영화의 시선에 가슴이 저리지만 동시에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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