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랑 Jul 19. 2019

네 발로 기지 마, 두 발로 걸어

영화 '파리의 딜릴리'를 보고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벨 에포크의 파리, 어느 날부터 어린 여자 아이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마스터 맨’이라고 불리는 범죄 조직이 여자 아이들을 납치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어린 여자 아이인 딜릴리와 배달부 오렐은 파리를 돌아다니며 사라진 어린 여자 아이들을 찾는다. 딜릴리와 오렐은 예술가에게서 마스터맨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피카소, 로댕, 모네, 드뷔시, 스쿼도프스카 퀴리(마리 퀴리) 등을 만난다. 예술을 다룬 영화답게 그림체가 아름답고 원색의 단조로운 색채감이 부드럽다. 부드러운 그림체로 표현했지만 당대의 차별을 다루는 시선은 가히 대담하다. 돌려서도 말하고 대놓고도 말하는 영화가 마음에 든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딜릴리는 프랑스인과 카나카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다. 딜릴리가 여자 아이들을 잡아가는 마스터 맨 중 일부를 잡자 프랑스 언론에서는 ‘카나카 소녀가 마스터 맨을 잡았다.’고 기사를 낸다. 자신을 카나카 소녀라고 부르자 딜릴리는 이렇게 말한다. “카나카에서는 나를 프랑스인이라고 하는데 프랑스에서는 나를 카나카인이라고 해. 둘 다로 불러주었으면 좋겠어. 아님 그냥 놔두거나.” 이 말을 듣는데 어린아이가 순수하게 세상에 한 방 먹이는 것 같아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본 세상은 차별과 혐오가 일상인 세상이었다. 이 말을 들은 대부분의 어른들은 딜릴리가 신기하고 대견하면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성차별 문제를 다룬다. 마스터 맨들이 여자 아이들을 납치한 이유는 여자들이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스터 만든 여자아이와 몇몇의 성인 여자를 납치해 네발로 기게 한다. 여자는 두 발로 서서는 안 되며,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마스터 맨의 세계에서 의자와 같은 받침의 역할을 해야 한다. 어린 여자아이를 납치하는 이유는 성인 여자를 길들이기는 어려우니 어릴 때부터 네발로 기게 교육을 하기 위해서다. 마스터 맨의 계략으로 딜릴리도 이곳에 잡혀갔다가 하수구로 탈출을 하게 되면서 아이들이 어디에 갇혀있는지 알게 된다. 딜릴리와 오렐은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비행선을 타고 아이들이 갇혀 있는 곳에 굴뚝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구출할 계획을 세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여자 아이들을 구출하는 장면은 극적인 동시에 현실과 같은 지점이 있다. 딜릴리와 오렐이 여자 아이들을 구하러 가자, 여자 아이들은 빨리 도망쳐야 하는 상황임에도 네발로 기어서 움직인다. 교육의 무서움을 한눈에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딜릴리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두 발로 걸어! 다시는 네 발로 기지 마!” 이 말을 듣고 아이들은 일어나서 두 발로 뛰기 시작한다. 네 발은 여성을 억압하는 수많은 사회구조 속에서 여성이 갖게 되는 수동성이고 두 발은 인간다운 행동이다. 아이의 관점에서 뱉어지는 단순하지만 깊이 있는 말들이 깊게 울린다. 


아이들은 굴뚝을 통해 빠져나와 비행선에 탄다. 그 당시 비행선은 지금의 비행기와 달리 스스로 페달을 밟아야 하는 형태였다. 아이들은 비행선에 타고 가만히 있지 않고 스스로 열심히 페달을 저어 탈출한다. 피해자인 아이들을 그저 구조당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탈출하고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아는 주체로 묘사한 점은 현실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피해자라고 해서 가만히 있으란 법은 없다.


물랭 루주의 <라 굴뤼>


이 영화에는 벨 에포크 당시에 존재했던 무희가 짧게 등장한다. 딜릴리와 오렐이 마스터 맨에 대한 힌트를 찾던 중 무희가 공연을 하는 곳에 가게 된다. 당시 무희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여성 직업군이었다. 유모, 가정교사 등은 조신하고 얌전한 전형적인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었던 반면 무희와 성판매자는 타락한 여성이 갖는 직업이었다. 이 영화에는 물랭 루주가 당시를 대표하는 무희인 ‘라 굴뤼’를 그린 포스터가 등장한다. 포스터 속 라 굴뤼는 다리를 번쩍 들어 올리고 안의 속바지를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치마 속을 바라보는 위치에 얼굴이 정확하지 않은 신사의 모습이 있고 라 굴뤼를 둘러싼 그림자의 형태가 음험한 것으로 보아 그녀를 성적 구경거리로 바라보던 시선을 알 수 있다. 벨 에포크의 남성은 무희를 아티스트로서의 무용가가 아니라 성적 유희를 제공하는 여성으로 보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딜릴리를 비롯한 어린 여자아이들이 영화 속 라 굴뤼의 춤을 연상시키는 춤을 춘다. 왜 굳이 여자 아이들이 성적 대상화되던 무희의 춤을 추는 장면을 넣었는지, 아이들이 성적 대상화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던 건지 의문이 들었다. 제작진의 의도는 모르겠으나 영화의 흐름 상, ‘아이들도 출 수 있는 평범한 춤을 성적으로 희화화하고 대상으로 삼은 것은 남성이라는 일침을 가하기 위함이었다.’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 라 굴뤼의 춤이 성적 대상화되던 춤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아이들의 춤은 전혀 성적이지 않았다. 그저 춤일 뿐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무희의 춤을 보던 시각이 틀렸음을 말했다. 


성별, 인종 등 차별의 문제를 아이의 시선에서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다룬 것이 특징인 영화였다. 그런 시선 덕분에 벨 에포크의 파리 현실이 더 무섭기도, 더 잔인하게도 여겨졌다. ‘여성이 교육을 받아서는 안 된다.’였던 당대의 여성혐오가 현재도 크게 변하지는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여자가 뭐 하러 대학원까지 가냐며 지원을 끊는 부모를 봤고, 남자 형제에게는 재수, 삼수 비용을 투자하지만 여성인 내 친구에게는 그러지 않는 경우도 봤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때 영화가 낭만을 그려내면서 간극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파리의 딜릴리’는 거짓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희망찬 미래가 아니라 잔인한 현실 속에서 소수자가 연대하는 모습을 그렸다. 소수자가 인식의 부재를 깨우칠 때 변화는 시작한다. 딜릴리의 친구들은 더 이상 네 발로 걷지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두 발은 지치지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 강하다. 

작가의 이전글 그래도 남겨진 여운에 달이 참 아름답네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