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하다. 영화를 보기 시작해서 끝까지 그랬고, 보는 내내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결혼을 한 적도 없고, 아이를 낳고 키운 적은 더더욱 없는 내가 이 영화에 그토록 공감이 가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남녀공학이지만 분반이던 고등학교를 다닐 때, 여자반에 있던 여학생들은 마스크를 끼고 등교해 점심시간이 되기 전 화장을 했다. 화장을 안 해도 입술 정도는 꼭 붉게 칠했다. 점심시간에 다른 반 남학생들과 마주치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소문이 들렸다. 남자반 애들끼리 여자애들 외모 순위를 매겼는데 누가 1등을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어떤 애가 1등 한 아이에게 "좋겠다"라고 말했다. 교복 치마를 짧게 줄여 입고 다니는 여학생에게 보건 선생님이 "창녀가 그렇게 입고 다닌다."라고 말한 적도 있었고, 나이 많던 남자 선생님은 여학생 어깨를 토닥일 때 브래지어 끈 있는 부분을 느끼듯이 만졌다. 분명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냥 우리끼리 뒤에서 욕하는 것,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성인이 되고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만 내가 다닌 학교가 특이해서 그런 일들이 있었던 건 아니라는 것,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일상적으로 같은 일을 겪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일들의 연장선 속에 82년생 김지영이 있다. 앞선 일들을 겪고 자란 97년생의 우리는 82년생의 김지영이 걸어갔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완벽히 똑같은 길은 아닐 것이다. 미투 운동이 일어나고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여자라서' 받는 일상적인 대우들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97년생의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안전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아직도 많은 회사들이 채용할 때 일부러 여성의 점수를 깎고 많은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공중화장실을 써야 할 때 얼굴이라도 가리고 볼일을 본다. 내가 볼일을 보는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가더라도 누군가 나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서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스티커를 붙였다가 같은 학교 남학생들이 "죽이겠다"라고 협박을 해 등하교 때 부모가 데리러 오는 경우도 봤다. 영화 속 82년생의 지영이가 겪은 일과 97년생의 우리가 겪은 일이 너무나 비슷해서 그의 30대, 40대를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를 보기 전 꽤 많은 사람들이 "공유 정도면 괜찮은 남편이다.", "저런 시댁 있으면 시댁 살이 할 만하겠다."라고 얘기를 해서 정말 그런 줄 알았다. 극 중에서 공유가 맡은 역할인 김지영의 남편 대현은 '무지하고 적극적인 방관자'다. 아이를 낳으면 모든 게 바뀔 것 같아 두렵다고 하는 지영에게 "제가 많이 돕겠습니다."라며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이고 밥을 차려달라고 조르며, 육아휴직을 쓰려고 했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노발대발하니 결국 거기서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독박 육아를 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지영에게 조금 더 쉬다가 일하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대현이 괜찮은 남편이라는 말을 듣는 이유는 퇴근하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아이를 목욕시키는 모습, 그래도 육아휴직을 쓰려고는 하는 모습, 지영이 아픈 것이 자신의 탓인 것 같아 우는 모습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아빠에게 관대하며 엄마에게 너무 가혹하다. 남편이 회사를 다니며 아이와 놀아주는 건 멋있는 일이고, 아내가 회사에 다니며 아이를 전담케어하는 것은 이 시대의 커리어 우먼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된다. 그래서 고작 이 정도로 대현을 '괜찮은 남편'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퇴근 후에 아이 목욕을 시키는 것 정도는 자신의 밥을 차려주는 아내 옆에서 당연한 일이고, 회사에서 남성이 육아휴직 쓰는 게 눈치 보이는 이유는 쓰는 남성이 더 적기 때문이며 그럴수록 남성들은 더욱이 육아휴직을 쓰고자 해야 한다. 지영이 아픈 것이 자신의 탓인 것 같다며 펑펑 우는 대현을 보며 지영은 자신이 빙의되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동안 고생했겠다"라고 말한다. 마음껏 울지도 못한다. 이 장면이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방관자이자 가해자인 대현이 지영의 고통을 헤아리는 것보다 자신의 죄책감을 씻어내는 일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대현은 그동안의 고통에 마음껏 울 수 있는 권리조차 지영에게서 뺏어갔다. 영화를 본 누군가가 나는 대현 정도는 하는 남편이니 괜찮다거나 대현보다 나은 남편이라는 우월감에 빠지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설령 대현보다 나은 남편이라고 한들 그 모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물론 지영이 마음의 병을 갖게 된 것이 대현의 탓만은 아니다. 사회의 모두가 공범자다. 회사에 다니는 여성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때가 되면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쓸 것을 예상하고 큰 프로젝트에서 제외시키기도 하지만 남성이 곧 아이를 낳게 된다고 할 때는 아무도 그가 육아휴직을 쓸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여전히 양육과 집안일은 여성의 본능에 따른 것이니 '고된 일'이 아니라 '편한 놀이'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 예로 얼마 전 한 여배우가 본인의 SNS 계정에 82년생 김지영이 얼른 개봉했으면 좋겠다는 글을 올렸고 그의 남편이 '????'을 댓글에 달았다는 기사가 났을 때 많은 댓글들이 "벚꽃 연금 받고 편하게 집에 있으면서 남편을 욕 먹인다."라고 말했으며 결국 해당 게시글은 삭제가 되었다. 여전히 여성의 양육과 집안일은 가치있는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회분위기는 몇 명의 음모나 계략이 아니며 우리 모두가 하루하루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까지 보며, 나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왔다. 커플이 있었고, 가족 단위로 보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펑펑 우는 중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 엄마랑 똑같아"라고 말하며 눈물을 도저히 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울면서 영화관을 빠져나갔다. 영화 속에서 지영이가 어릴 때 엄마에게 "그럼 나 때문에 (선생님) 못하는 거야?"라고 물었던 장면이 생각났다. 그 아이가 엄마한테 미안한 마음을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엄마가 82년생의 김지영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건 너를 낳고 키우기 때문이 아니라 엄마는 '맘충'이 되고 엄마가 되지 않은 여성들은 '애국심이 없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세상의 탓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영화의 결말은 다소 희망차다. 지영이 카페에서 '맘충'이라는 모욕을 듣고 "나를 안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 말을 하냐"라고 따지고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이 장면이 가장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지영이 '맘충'이라는 말을 쓴 사람에게 꼬박꼬박 대꾸를 할 때, 그 남성은 지영을 한대 칠 기세였다. 현실 속에서 엄마가 아이와 단둘이 있을 때 맘충이라는 단어에 반박하며 따지고도 안전에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영화의 결말에 만족하고 싶지 않다. 나는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선례를 많이 보았고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을 계획이다. 하지만 어떤 여성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것이 꿈일 수 있다. 이런 꿈을 얕잡아 보거나 숭고한 희생으로 여기지 말고 그저 그 사람의 선택으로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 여성들이 다수가 되었든, 소수가 되었든 사회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고 여성이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을 택하든지 그것으로 인해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벌레 취급받지 않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