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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랑 Nov 19. 2019

외면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

「안나와디의 아이들」을 읽고

발전 패러독스를 생생하게 느꼈다. 공항 바로 옆에 위치한 안나와디를 통해 발전과 빈곤의 극심한 대비를 공간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글로 묘사된 공간적 대비는 직접 보지 않았어도 발전 패러독스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대개 발전을 하면 빈곤 인구가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발을 위해 도심의 빈민촌을 쓸어버리면 빈곤 인구들은 점점 더 도시 외곽에 빈민촌을 형성할 뿐 존재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 책은 작가인 캐서린 부가 실제 뭄바이의 안나와디를 방문해 겪었던 일을 엮어 만들어졌다. 

내가 알고 있는 인도의 빈민촌 사람들은 신비롭지도 않았고, 구제불능도 아니었다. 그들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았다. (중략) 창의적으로 삶을 개선해가고 있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안나와디의 사람들은 우리와 별 다를 게 없다. 그들은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삶을 살고 있었으나 인간으로서 존중받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 문제는 그들이 스스로 해결하기에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다. 


아샤는 안나와디에 사는 야망이 큰 여자다. 현대화되고 있는 인도였지만 여자 빈민촌장은 드물었고, 어쩌다 권력을 쥔 여자들은 남성의 대리자인 경우가 많았지만 아샤는 안나와디의 진정한 빈민촌장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 있는 사람들의 라인을 잘 타야 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여성 자활 프로그램을 악용해 뒷돈을 챙기거나 마을의 분쟁을 해결해주겠다며 사이에서 돈을 일부 가로챘다. 경찰은 가난한 사람들의 분쟁 따위에 관심이 없거나 뒷돈을 요구했기 때문에 아샤는 그 점을 아주 잘 이용해 경찰과 안나와디 사람들의 중개인 역할을 했다. 아샤는 빈민촌장이 되고 나서도 어떻게든 더 높은 정치인이 되고자 했다. 부정한 짓을 하면서도 거물들도 같이 하는 건데 누가 나한테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냐며 합리화했다. 아샤는 그렇게 권력을 가졌다. 아샤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 가난한 사람들을 대표해 그들의 이익과 권익을 대변하라고 만들어놓은 자리에 앉아 결국 자기 이득만 취했다. 다른 고위급 정치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아샤를 비난하자니 사회가 너무 엉망진창이다. 남을 물어뜯지 않으면 내가 물어뜯기는 사회에서 아샤는 조금 더 잘 살고 싶었을 뿐이며, 계급이 적나라하게 나뉘어있는 사회에서 물기 쉬운 사람을 물어뜯었던 것이다. 아샤를 비난하려면 아샤의 행동에 선행하는 원인에 대한 비난, 비판과 개선이 우선되어야 한다. 


미나는 안나와디에서 태어난 최초의 여자 아이다. 미나는 툭하면 부모와 오빠들에게 맞고 살며 하루 종일 집안일을 해야 해서 물을 받으러 가거나 공동 변소에 갔다 오는 게 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경우였다. 미나네 가족은 모두 경제, 계급 불평등의 피해자였으나 그에 더해 미나는 성과 연령에 따른 수평적 불평등까지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집안일, 하기 싫은 일을 모두 더 약자인 미나에게 주었고 스트레스를 풀고 화풀이할 수 있는 대상으로도 역시 미나를 삼았다. 결국 어느 날 미나는 쥐약을 먹고 자살했다. 예전에 ‘아프리카 마을에 진흙물을 깨끗한 물로 걸러주는 도구를 나눠주거나 마을 근처에 우물을 파주는 것이 결코 여성을 돕는 일이 아니’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몇 킬로미터가 되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나, 그것이 여성들이 집안일과 가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빈곤에 대한 해결책을 생각할 때 가장 고려되어야 할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제1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가까이서 물을 뜨는 것이 편하다고 해서 제3세계 사람들에게 그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타자화하지 않고 타자임을 인정하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타자로 인정되는 대상도 주로 빈민촌의 남성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미나와 같은 여성들은 소외되고 타자화된다. 미나가 쥐약을 먹고 병원에 실려 갔을 때 경찰은 미나에게 “누구의 사주냐”라고 물었다. 아무도 미나가 당했을 젠더 불평등을 알지 못했고 그것을 자살을 시도할 만한 이유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경찰은 안나와디의 사람들을 귀찮아했고, 돈을 더 챙길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열심히 돌아다니던 칼루가 공항 앞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을 때 경찰들은 ‘폐결핵’을 죽음의 원인으로 결정했다. 칼루의 죽음을 목격했고, 경찰의 위협과 구타에 시달렸던 산자이가 쥐약을 먹고 자살했을 때도 경찰은 산자이가 왜 죽었는지는 찾아내려 하지 않았고 그저 돈이 없어 헤로인을 구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중독자로 취급했다. 칼루가 마약상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수 있고, 산자이가 경찰로부터의 위협에 벗어날 자신이 없어서 죽었을 수도 있지만 경찰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안나와디라는 좁은 사회에서 경찰은 가장 권력자다. 그들은 안나와디 주민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운 다음 돈을 요구하기도 하고 돈을 빨리 받아내기 위해 그들을 때리고 협박하는 일도 일삼았다. 안나와디 사람들은 무차별적인 폭행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었고 경찰을 신뢰하지 못하고 두려워했다. 그들이 받은 불공정함과 부정의를 고발할 수 있는 창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보호막이 없어 자기 한 몸도 지킬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결국 연대하지 못하고, 서로를 적으로 싸웠다. 


공항 옆에 빈민촌이 형성되고 빈민촌 내에서도 서로를 밟고 조금이라도 더 올라가려는 모습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보면 근본적으로 ‘자본주의’가 떠오른다.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가 가장 효율적인 경제라고 말한다. 공산주의의 문제를 얘기할 때는 사회의 효율성을 떨어트리고 소유에 대한 개념이 없어 부패하게 되는 등 많은 얘기를 하지만 자본주의의 문제는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작은 일 정도로 치부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공산주의 사회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역시 공산주의 못지않게 문제를 갖고 있음에도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자들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는 과학으로서 현실을 단순화하여 사례를 들거나 모형을 만들어서 경제를 설명한다. 하지만 단순화된 사례와 모형은 매우 편파적이다. '쉽게 배우는 경제학 플러스'라는 책에 이런 예시가 나온다.  ‘무인도에 개미, 베짱이, 방아깨비가 살고 있다. 개미는 열심히 일했고, 베짱이는 열매를 따먹으며 편하게 살았고, 방아깨비는 베짱이보다는 열심히 일하고 개미보다는 덜 했다. 그러다가 무인도에 태풍이 쳐 과일이 다 썩어 버렸다. 개미는 그동안 일해서 일궈놓은 것으로 먹을 것이 풍족했고, 방아깨비는 본인이 먹을 게 있었으며 베짱이는 먹을 게 없었다. 그렇다면 개미가 베짱이를 도와줘야 할까?’ 경제학자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골라 현실을 축소화했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바꿔보면 다른 결론이 나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성향, 노력만 경제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태초부터 갖고 태어난 자원이 다르고, 사회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도 다른데 이러한 것 모두 개인의 경제적 성공에 영향을 미친다.


위의 예시는 그러한 점을 간과했다. 부모의 재력에 의해 기회가 달라지는 사회이기에 무인도라는 설정은 적절하지 않다. 성별에 따라 기대되는 역할과 사회에서 제공하는 혜택이 다른 사회에서 베짱이가 과연 일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고려 없이 베짱이의 생산성을 평가할 수는 없다. 게다가 현실 사회를 고려해봤을 때 베짱이가 가사노동을 담당했음에도 누군가 ‘베짱이는 열매나 따먹으며 편히 살았다’고 봤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설령 베짱이가 가사노동을 담당하지 않았다고 쳐도 현실에서 가난한 사람의 대다수는 치열하게 살아감에도 가난하다. 게으름만이 가난이라는 결과를 불러오지는 않는다. 사회구조적인 이유로 빈곤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인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빈곤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려는 시선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경제학이 간과한 점으로 인해 빈민촌 사람들은 총체적인 문제를 껴안게 되었다. 총체적인 문제들은 빈곤 여성에게 더욱 극심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인도에서 근대화가 일어나면서 남성들은 다양한 불평등과 카스트 차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고 점점 서구화된 남성 엘리트가 되었다. 하지만 같은 계급의 여성은 발전을 따라가지 못했고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극심해졌다. 그 뒤로 여성의 발전을 돕는 여러 단체들이 활동을 했고 시간이 지나서는 농촌 여성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안나와디의 아이들」에서는 빈민촌 여성을 돕기 위한 프로젝트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혹은 악용되는지에 대한 서술이 매우 적다. 간혹 여성 빈민촌장은 없었다거나, 딸에게 음식을 예쁘게 해야 결혼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빈곤한 여성의 이야기를 충분히 담지는 않았다. 이 책을 보고 유독 빈곤 여성에게만 나타나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빈곤한 남성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빈곤의 여성화’에 좀 더 초점을 맞췄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유니세프에서 단순히 사진으로만 보던 ‘불쌍하고 착한 빈민촌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 속에서 치열하게, 그래서 때로는 부도덕적이게 살아가는 빈민촌 사람들’을 보며 자본주의의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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